이럴 줄 몰랐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대 증원을 발표한 게 지난 2월이니 벌써 9개월째다. '한꺼번에 2천 명?' 보면서도 속으로는 설마설마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불 보듯 뻔한데 조정을 하든지 아니면 뭔가 복안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장관의 표정은 다 계획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2024년 대한민국이 "아프지 마세요"를 인사말로 주고받는 나라가 되었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응급실 뺑뺑이'에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듯 살고 있다. 그렇게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이젠 걱정하는 것도 지쳐 거의 체념한 듯 살지만 불안한 마음까지 가신 건 아니다. 그리고 이따금 생각할수록 화도 난다. 대체 나라에 전쟁이 난 것도, 무슨 부도가 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정부의 말에 의하면 '국민을 위한' 의료 개혁이라는데 이런 게 국민을 위한 거라면 사양하고 싶을 뿐이다. 1년이 다 돼 가도록 병원으로 돌아오는 전공의도 거의 없고 학교로 돌아오는 학생 또한 거의 없다. 과로에 지친 교수들은 쓰러질 지경이고 실제로도 그런 일이 생겼다. 그런데 정부는 딱히 뭘 어쩌겠다는 게 없다. 주로 하는 건 위력을 행사하거나 돈을 쓰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2천 명 중 단 1명도 줄일 수 없다고 할 땐 마치 전선을 사수하는 전쟁터의 지휘관 같았다. 항의하는 의사들은 명령과 의법 조치, 그리고 사법기관 합동 회의 등으로 압박했다. 지난 2일엔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의 휴학을 승인한 서울대를 향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강도 감사에 착수했다.
그래 놓고 며칠 뒤 학생들에 대한 조건부 휴학 승인, 의대 교육과정을 5년으로 단축하는 방안 검토 등의 내용이 포함된 비상 대책안을 발표했다. 막무가내 주먹구구 땜질식 처방도 이런 건 처음 본다. 그렇다면 치의대와 한의대는 어쩔 것이며 교육의 질은 또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
이뿐 아니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에 대해서도 관련 규정을 개정하겠다며 입법예고를 했다. 이번에 증원한 의대에 대한 평가 강화를 발표하고 나서니 이유는 누가 봐도 뻔하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다. 이젠 정부의 목표가 의료 개혁인지 의대 증원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 드는 것도 그렇다. 응급실에 근무할 의사가 부족해지자 전문의 진찰료를 최대 350%로 올렸다. 그리고 중증이 아닌데도 응급실을 찾는 환자에겐 진료비의 90%를 부담시킨다고 한다. 보건복지부 차관의 말에 따르면 경증인지 중증인지 전화로 물어볼 정도면 경증이니 응급실 이용을 자제해야 한다.
젊은 의사들에게도 자꾸 돈 이야기부터 꺼낸다. 그 딴에는 잘해 보려는 말이겠지만 의사 숫자가 늘어도 장차 소득은 줄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식이다. 듣는 입장에선 엉겁결에 돈만 밝히는 사람이 되어 버린 듯할 수도 있다.
이번 사태로 힘들어진 대형 병원들의 문제도 돈으로 해결하고 있다. 이미 1조원이 넘는 돈을 지원했고 상급종합병원을 중환자 중심 병원으로 개편하는 데 3년간 10조원의 돈을 더 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재원은 모두 국민이 낸 보험료로 조성된 건강보험 재정이다. 심지어 이미 지출한 돈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의 논의나 의결도 거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의사 수를 한꺼번에 늘리려다 오히려 1만 명이 넘는 의사가 한번에 사라졌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마당에 의사 수만 늘린다고 필수의료 부족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도 않다. 대통령실은 지난 추석 연휴 의료대란은 없었다며 으쓱했지만 그렇게 아슬아슬하게나마 넘긴 건 국민이 잘해서지 정부가 잘해서가 아니었다.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고 지난주엔 충남대병원과 강원대병원에 이어 충북대병원마저 응급실 운영을 축소했다.
사람들은 이제 의료 개혁이고 뭐고 그냥 예전처럼만 살고 싶다고 한다. 국민의 입에서 이런 소리까지 나온다면 이건 의사가 아니라 정부 여당이 책임져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자꾸만 아직 괜찮다고 한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국민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여·야·의·정 협의체를 구성하자더니 변죽만 울릴 뿐 뭣 하나 내놓는 게 없다. 야당은 수수방관, 어떨 땐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국민이 맡긴 돈과 권력은 마음껏 쓰라고 주어진 게 아니다. 더구나 의료 개혁은 국민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설득하고 또 설득하고 조율하며 타협해야 한다. 국민은 지금 괜찮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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