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이 남자를 보라!

돈 끼호떼 1.2
미겔 데 세르반떼스 지음 / 창비 펴냄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돈키호테에 관한 내 기억은 동화로 시작해 가수 이청의 노래 돈키호테로 이어지더니 석래명 감독의 영화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에서 정점을 찍는다. 당대 톱스타 박중훈 최재성 최수지 진유영을 캐스팅했고, 속편 '내 사랑 동키호테'도 나왔다. 그 뒤로 한참을 잊고 지낸 돈키호테를 다시 불러낸 건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였다. 데뷔 초기인 80년대 그의 별명은 영화계 악동이었다. 금기를 위반하는 기괴한 소재로 당시로는 뜨악할 만한 영화를 거듭 내놓았기 때문. 그랬던 알모도바르는 안정의 90년대를 보내더니 2000년을 기점으로 거장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알모도바르를 가리켜 '거울 앞에 선 돈키호테'라고 칭해왔다. 오목거울에선 비쩍 마르고 기괴한 알폰소 키하다의 모습이지만 볼록거울에 서면 단신의 뚱뚱한 싼초 빤사가 되는. 알모도바르의 초기작이 좌충우돌과 금기위반으로 상상력을 맘껏 발휘하던 돈키호테였다면 21세기에는 얌전해지고 현실과 타협하는 싼초 빤사에 가까웠다.

정작 내가 돈키호테를 끝까지 읽은 적이 있었나. 왜 이런 생각을 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책을 읽을 결심을 하게 되었고 민용태 교수의 원전 완역본과 만났다. 오래 전 TV에서 보여준 유쾌한 모습이 기억에 선명했고, 이분이 번역했다면 무척 재미있을 거란 기대가 컸다. 2017년이었을 것이다. 제목은 '돈 끼호떼'. 서점에서 책을 보자마자 좌절했다. 시뻘건 데다 1.2권으로 구성되었는데 무려 1700쪽을 상회했으니까(이걸 언제 다 읽어?). 완독의 기쁨을 누리기까지 4개월쯤 걸렸다.

그리고 올여름 두 번째로 책을 잡았다. 7~8월 안에 끝내겠다고 결심했고 재독에 성공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엉뚱하고 모험 좋아하는 몽상가를 돈키호테라고 부르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무척 게으른 단정이다. 지금은 대체로 아는 얘기지만 '돈 끼호떼'의 원저자는 세르반떼스가 아니라 시데 아메테 베넹핼리. 그러니까 베냉핼리의 원전을 세르반테스가 어느 시장에서 우연히 발견했고 아랍어 번역가를 고용해 번역한 후 이야기를 덧붙인 게 우리가 아는 돈키호테라는 얘기다.

'돈 끼호떼'는 기사소설에 경도된(모든 걸 책으로 배운) 라만차의 이상한 양반 알론소 끼하다가 돈 끼호떼라는 방랑기사가 되어 겪는 모험을 1권으로 하고, 싼초 빤사가 섬의 총독이 되는 과정과 돈 끼호떼가 신중하고 지혜로운 인물임을 드러내더니 기사소설을 배척하고 자신의 방랑생활을 마감하며 임종하기까지를 2권에 담았다. 책의 전반부가 돈 끼호떼와 싼초 빤사의 종잡을 수 없는 스탠딩코미디라면 후반부는 의젓한 어른들의 휴먼드라마인데 색깔이 너무 달라 당황스러움에도 드라마틱한 반전의 재미가 상당하다. 혹자는 2부가 지루하다지만, 현실과 이상을 대조하면서 당대 계급질서와 종교 억압까지 두루 통찰하였으니 깊이가 상상을 초월한다.

작가는 두 가지를 갖추면 무적이라고 했다. 첫째, 인상적인 캐릭터를 창조하고. 둘째 사람들로 하여금 캐릭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집중하게 만드는 능력. 캐릭터의 끔찍함을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독자가 캐릭터를 미워할 수 없다면 과연 대문호라 불릴만하다. 예컨대 미겔 데 세르반떼스, 그리고 돈 끼호떼.

철 든 걸 보니 죽을 때가 되었나? 라는 세간의 농담을 온몸으로 증명해준 남자, 실제로 또박또박 쓰인 증언이 여기에 있다. '돈 끼호떼'를 끝까지 읽으면 만날 것인즉, 1700쪽 밖에 안 된다니까.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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