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0월 3일 오후 2시 경북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현 포항시 남구). 푸른 파도 철썩이는 바닷가에서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오늘은 벼르고 벼르던 영포지구종합제철공업단지 기공식 날. 두루마기 촌로, 양복을 빼입은 신사, 교복 차림의 학생, 까까머리 꼬마까지 줄 잡아 10만 인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모였습니다.
포항 거리마다 청사초롱, 만국기가 나부끼고 새벽부터 100여 대의 버스·승합택시·트럭이 지방민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트럭 짐칸도 못 얻어 탄 주민들은 먼지가 풀풀 나는 비포장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도 "선거 때 찍은 내 한 표는 되찾았다"며 저마다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철강공업이 없는 산업발전은 '제발로 서지 못하는 문어'. 각고의 노력으로 1966년 12월 6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발족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들이 빌려주기로 한 외자 1억불과 내자 151억8천100만원으로 건설하게 된 연간 60만톤의 철강 생산기지. 당초 기공식은 1일로 예정됐으나 국군의 날과 겹쳐 개천절 공휴일인 이날로 택해 더 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해병대 주악으로 시작된 식은 건설부의 사업 설명, 내빈들의 일장연설, 여고생들의 전진의 노래에 이어 기공을 알리는 발파음에 오색 풍선이 창공을 수놓으며 끝이 났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40분 남짓. '동양 최대 공장 건설'이란 소문에 잔뜩 기대하고 왔건만 여흥을 풀 행사도 없이 싱겁게 끝났습니다.
우천으로 연기된 국군의 날 행사가 이날 열린 바람에 박정희 대통령 얼굴은 구경도 못했습니다. 대신 참석한 장기영 부총리는 전날 내각개편으로 경질돼 하필 이날이 퇴진하는 날. 장 부총리마저 밋밋하게 치사를 끝내고는 식 도중 총총걸음으로 퇴장하자 그만 잔치판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볼 것도, 먹을 것도 없어 김빠진 기공식. 우르르 돌아가는 길만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기공식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그 다음. 이듬해 4월 1일, (주)포항종합제철이 창립되고 제철소의 꿈을 한창 키워갈 무렵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쳤습니다. "한국의 60만톤 제철소는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 1969년 4월, KISA는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의 이 같은 전망 보고서를 내밀며 끝내 차관 제공을 거부했습니다. 4년간 공들인 KISA를 통한 제철소 건설은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돈줄이 막혔으니 공사는 제자리 걸음.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새 돌파구가 절실했습니다. 이 무렵 한창 논의 중이던 대일청구권 자금은 한줄기 빛. 정부 당국자들에게 그것은 마치 제철소를 위해 준비된 구원투수 같았습니다. 일본 철강업계, 경제계, 정계 인사들을 찾아 집요한 설득 끝에 마침내 새 길을 찾았습니다.
제3차 한일각료회담 이틀째인 1969년 8월 27일, 정부는 일본측으로부터 포항종합제철 건설 지원을 이끌어냈습니다. 대일청구권 자금 중 농림수산 분야 자금을 제철소 건설에 전용할 수 있게 하고, 부족분은 일본수출입은행 차관으로, 공장도 60만톤에서 103만2천톤 규모로 키워 신일본제철 기술로 짓기로 했습니다.(매일신문 1967년 9월 26일~ 1970년 4월 3일 자)
1970년 4월 1일, 3년 전 첫삽을 뜬 그 자리에서 다시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백사장과 개펄, 무논, 솔밭을 쓸어 모은 공장 부지는 350만평(약 1천157만㎡).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공업국가 건설에 철강은 가장 근간" 이라며 "철강공업을 빨리 육성해 기계·조선·자동차·건설·군수산업 등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박태준 포항종합제철 사장은 "대일청구권 자금은 선조들의 피의 대가"라며 "공사 기일을 맞추지 못하면 우리는 전원 저 오른쪽 영일만에 들어가 빠져 죽는다"며 각오를 다졌습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마침내 제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지고 7월 3일 종합제철 1기 설비가 준공됐습니다.
준공 후 반세기가 흐른 지금 철강 생산(3천844만톤) 세계 7위(2023년 기준), 월드 스틸 다이내믹스(WSD) 선정 철강사 경쟁력 14년째 세계 1위. 오늘의 포스코는 그때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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