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화자(話者)인 '규하'에 대한 설정과 서술은 상당히 상세하다. 소설의 초반 상당 부분은 명문대를 다닐 만큼 명석했던 규하가 어떤 사연으로 미국 땅을 돌고 돌아 성수동에서 와인바를 운영하게 됐는지를 서술하는데 할애된다. 그래서 처음엔 캐릭터가 독특하고 매력적인 규하라는 여성이 주인공일 것이라 막연히 짐작하며 호기심을 갖고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이 책은 결국 '제이 강'과 그가 꿈에도 잊지 못했던 일생의 사랑 '유연지'에 대한 이야기다. 한때의 첫사랑을 다시 만나기 위해 막대한 부를 쌓고 매일 밤 강 건너 그녀의 집이 건너다보이는 초호화 펜트하우스에서 파티를 벌이는 제이 강(강재웅)의 사연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낯익은 이야기 같단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렇다. 작가 심윤경은 이를 제목을 통해 암시했다. '위대한 그의 빛'은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1925년 작 '위대한 개츠비'를 새롭게 쓴 소설이다. 읽기 전엔, 아니 중반부까지도 당최 '왜 이런 제목일까?' 의아했지만,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나서 다시 표지를 들여다보면 '아하!'하고 단숨에 이해가 가는 그런 제목이다.
작가는 1920년대 뉴욕을 무대로 한 베스트셀러를 2020년 서울로 옮겨온다. 미국 전통의 부호 데이지와 톰이 사는 이스트에그는 압구정동으로, 신흥 부자 개츠비가 사는 웨스트에그는 성수동으로 대체된다.
작가는 성수동과 압구정동이 마주 보고 있는 풍경을 보고 이 소설을 떠올렸다고 했다. "나는 한강을 따라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높고 얕은 두 건물들의 대칭성에만 집중하여 그곳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올드 머니와 뉴 머니를 대표하는 두 건물들이 찰랑이는 넓은 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이 풍경은 분명 낯익은 데가 있었다. 개츠비가 바다 건너편 가물거리는 초록 불빛을 향해 손을 내밀던 바로 그 자리에 선 놀라움 속에서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
책은 위대한 개츠비의 설정을 끊임없이 뒤집고 비튼다. 유사한 설정이지만 심윤경만의 시선으로 다시 풀어내 완전히 새로운 스토리가 전개되고, 심지어 전혀 다른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목격하고 서술하는 이가 남성인 닉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여성인 이규아로 반전된다. 이규아는 여성의 시선으로, 불가능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제이 강, 그리고 그의 '빛'이자 '욕망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유연지를 지켜본다. 그래서 제목은 '제이 강'이 아닌 '그의 빛'이다.
아이의 성별도 뒤바뀐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아이를 낳은 데이지의 독백 "딸이라서 다행이야. 이왕이면 아주 바보가 돼버려라. 이런 세상에선 바보가 되는 게 속 편하다. 귀여운 바보"라는 독백은 아들은 낳은 유연지의 "그래, 아들이 좋아. 커서 바보나 되겠지. 남자애가 그거 말고 다른 게 있어? 잘생긴 바보"로 변주되는 등 작품 속 곳곳에서 원작과 성별이 반전돼 등장한다.
하지만 1925년이든, 2020년이든 배금주의에 눈이 멀어버린 시대상을 비판하고자 하는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줄기는 그대로다. 바이오 스타트업과 가상화폐로 가공할 만한 물질적 성공을 이뤄낸 제이 강과 그를 자본주의의 영웅으로서 맹목적으로 추앙하는 인간군상들의 모습은 뉴스만 틀면 나오는 현재의 시대상 그대로다.
고전이 시대를 초월한 강력한 힘을 갖는 이유는 세월은 흐르더라도 인간의 속성은 변하지 않고 삶의 이야기는 되풀이된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개츠비'도, 이를 현시대로 옮겨온 '위대한 그의 빛'도 여전히 독자들의 강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책을 덮은 뒤 다시 '위대한 개츠비'를 비교해 읽고 싶어졌다. 268쪽, 1만6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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