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슬픔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드라마나 영화 속의 인물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은 즐겨 본다. 극화된 슬픔, 즉 비극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유를 카타르시스(catharsis)로 설명했다. 논란이 많은 개념이지만 일반적으로, 관객이나 독자가 주인공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느끼는 과정에서 마음이 정화되고 고양되는 현상을 말한다. 카타르시스는 예나 지금이나 비극의 목적을 이야기할 때 꼭 나오는 핵심 개념이다.
그러나 카타르시스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니체가 대표적이다. 그는 카타르시스를 기껏해야 심리적이고 윤리적인 효과에 그친다고 본다. 사실 정화니 고양(高揚)이니 하는 것은 생의 파토스를 제한하고 가라앉히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진짜) 비극은 생의 격정과 의지를 강화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이때 니체가 염두에 둔 것은 그리스 비극 중에서도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로 대변되는 BC5세기의 아티카비극(Attische Tragödie)을 말한다. 저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나 '오이디푸스왕'은 오늘날까지 최고의 비극으로 인정받아 왔다.
저 그리스 비극의 탄생과 몰락을 논하는 것이 1872년에 나온 '비극의 탄생'이다. 제목과는 달리 탄생보다 몰락에 관한 서술이 훨씬 많다. 몰락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런 것 같다. 역사 속에 사라진 고대 그리스 때문이 아니라 니체 자신의 시대 때문이다. 니체는 이성·계몽 중심의 근대문화를 왜소하고 병든 것으로 진단하고 그 치유를 비극의 부활에서 찾았다. 그러니까, '비극의 탄생'은 니체가 그리스 비극이 은근히 독일에서 부활하기를 기대하며 쓴 비극론이다. 기대할 만한 근거도 없지 않은바, 베토벤과 바그너를 그 근거로 봤다. 한 마디로 니체는 비극의 본질을 음악에서 발견했다. 특히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나 바그너의 음악극(Musikdrama)은 그리스 비극에 매우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이 아예 '음악 정신으로부터의(aus dem Geist der Musik) 비극의 탄생'이다. 과연 음악이 어떻게 비극의 모태가 되었단 말인가?
니체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비극의 전신(前身)은 제의나 축제 때 공연된 합창무(Chortanz), 즉 노래와 춤이었다. 노래와 춤으로 찬양하는 대상은 디오니소스 신이었다. 여러 신화가 말하듯이 디오니소스는 도취·광기·파괴·죽음, 그리고 부활을 의미하는 주신(酒神)이다. 쾌락과 고통, 생과 사의 극단을 오가며 실존의 범위를 다 살아낸 신이다. 그를 예찬하는 강렬한 합창무를 통해 관객뿐 아니라 공연자들도 자아를 망각하고 고통과 황홀경에 빠져든다.
이때 누구라 구분할 것 없이 모두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한다. 삶을 규율하고 본성(Natur)을 억압하는 도덕이나 법은 해체되고 소위 근원적 일자(Ur-Eine, 디오니소스)와 연합한다. 이 망아·도취·일체의 디오니소스적 상태가 음악 속에서 일어난다. 음악 정신이란 바로 이 디오니소스적 합체(合體)를 말한다. 이러한 미적 체험은 현실의 고통과 허무를 잊게 하고 강력한 생에의 의지를 살려낸다. 이 장엄한 무아와 근원적 일자와의 합일을 미학적 범주로 말하면 숭고미(das Erhabene)에 가깝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너무 과격하고 파괴적인 경향이 있어 형식과 질서를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무대에 연설하고 대화하는 배우가 도입된다. 합창이나 음악과 달리 개인의 말은 이성과 절도를 전제한다. 이것을 니체는 아폴론적인 특성이라고 한다. 태양의 신인 아폴론은 이성과 질서를 대변하고 예술은 특히 조형예술을 관장한다. 음악과 달리 시각성이 중요하다. 이렇게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의 토대에 아폴론적인 언어가 결합하여 비극이라는 드라마가 탄생한다.
좋기로는 이 양자가 균형을 잡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만 현실은 대체로 어느 한쪽으로 기울었다. 어떤 때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주도하고 어떤 때는 아폴론적인 것이 주도했다는 뜻이다. 니체는 이상적인 아티카비극 이후 서양 비극은 몰락의 길을 갔다고 평가한다. 무대에 음악과 춤이 약화하거나 아예 사라지고 무미건조한 언어유희만 난무하기 시작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음악 대신 대화가 극을 주도한다는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숭고와의 결별을 뜻한다. 대신 아폴론적인 지성과 논리가 득세한다. 이것은 조화롭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제공할 수 있지만 피상적이고 힘이 없는 가상이다. 니체는 이러한 아폴론적인 이성과 합리성이 만드는 가상이 디오니소스적인 파토스에 의해 부서질 때 비극성이 부활할 것이라고 봤다. 요행히 그 부활의 조짐이 바그너의 악극에서 보였지만 더 발전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한다.
철학자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몰락을 몰고 온 원흉을 소크라테스로 봤다. 소크라테스는 지식과 지혜를 최고의 가치로 보고 평생 진리를 추구한 철학자다. 그는 예술, 즉 아름다움도 지적으로 근거 지워져야 하고 투명하게 의식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디오니소스적 비극은 비합리적이고 논증될 수 없는 것으로 쓸 데 없는 것이었다. 니체는 그런 소크라테스를 신봉한 에우리피데스가 나타나 무대에 디오니소스적 음악을 제거하고 극화된 서사시만 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즉, 에우리피데스가 비극을 이성적 철학극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비극이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요행히 비극의 부활이 바그너의 악극에서 그 조짐을 보였지만 더 발전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한다.
니체의 비극론이 우리 시대에 어떤 참조가 될지는 각자의 공부와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다만 한국의 경우 니체가 말하는 비극을 떠나 일반적인 의미의 비극조차도 그 회피 현상이 매우 심한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양지만 바라보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시각으로는 삶과 세계의 깊이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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