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종종 가보지 않은 길, 가상의 역사를 상상하곤 한다.
만일 고려 말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지 않고 요동정벌에 나섰다면 만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 우왕 14년(1388) 명나라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심양 남쪽 봉집보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명나라 영토로 편입하려고 하자 우왕과 최영은 "이 땅은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고려 땅"이라고 분노해서, 이성계와 조민수를 좌·우군도통사로 임명, 5만 명의 대군을 출정시켰다.
그러나 1차 요동정벌(1370)의 주역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면서 요동정벌에 반대하고 나섰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면 이길수 없으며 여름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되며 왜적이 침입할 가능성이 있으며 장마철이라는 등의 이유가 그것이다.
이에 최영은 명나라가 대국이기는 하지만 북원과의 전쟁으로 요동방비는 허술하고 곧 가을이라 군량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으며 왜적은 정규군이 아니므로 충분히 방비할 수 있고 장마철이라는 조건은 명나라도 같다며 이성계의 반대를 일축하고 요동출병을 강행했다.
최영의 패착은 직접 요동출병을 진두지휘하지 않고 개경에 머문 것이었다. 이성계가 5만의 대군을 이끌고 위화도에서 회군해서 개경을 공격한 것이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군사쿠데타'였다. 고려는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 조선이 탄생했다.
역사를 되돌려 그 때 만일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고 요동정벌에 성공했다면 만주는 지금도 우리 땅이 되지 않았을까?
◆역사의 아이러니는 계속된다.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동참한 '정도전'과 달리 이성계의 무신쿠데타와 조선 개국에 반대한 이색과 정몽주, 길재 등 '고려 삼은(三隱)'이 조선 사대부의 행동규범과 철학의 바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의 사대부 인재를 공급하는 산실 역할을 했다.
목은(牧隱) 이색의 제자였던 정도전과 정몽주 그리고 길재는 각기 다른 길을 걸으면서 이성계에 반대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옹호하고 각종 제도와 법률을 제정하는 등 조선왕조 집권이데올로기를 제공한 정도전과 달리 정몽주는 동문수학한 인연의 이방원이 부른 '하여가(何如歌'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단심가'(丹心歌)로 대응하다가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았다.
후일 조선 사림(士林)은 정몽주를 충절을 지킨 이상적인 사대부로 극찬했고 정도전을 '조선 최대의 악인'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사람이 내린 조선개국 공신과 고려충신에 대한 엇갈린 평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야은(冶隱) 길재 역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며 조선 개국 후 이방원이 태상박사에 임명해도 부임을 거절하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후학양성에 몰두했다. 길재가 후학들을 받는다는 소문에 전국에서 유생들이 몰려들었다.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사사받은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박영(朴英)·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으면서 조선 초기에 필요한 인재들인 사대부를 공급하는 산실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고 반대한 학자들이 오히려 조선을 이끈 사대부들을 양성하고 지배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 산파가 된 셈이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다. 사대부는 곧 선비다. 선비들의 숲, '사림'(士林)파는 정몽주와 길재처럼 주자학(경학과 도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하지 않고 향촌에 은거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세력을 말하는 데 길재 등이 은거한 영남에서 강했다. 서원은 영남사림의 근거지 역할도 동시에 수행했다.
◆ 길재의 학문과 충절을 기려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금오서원은 '길재'(吉再)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선조 5년(1570년)에 건립된 서원으로 금오산 자락에 건립됐다. 그곳에서 길재 선생이 노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된 후 원래 있던 금오산자락이 당시 너무 외지다는 이유로 현재의 남산(藍山) 기슭인 선산읍 원리에 1602년 복원됐다.
임금이 현판을 하사한 사액서원인데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페령'에서도 제외돼 철거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길재 외에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금오서원 팻말을 따라 좁은 마을 골목길을 돌아 언덕을 올라가야 금오서원을 만날 수 있다.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외삼문 역할을 하는 붉은 단청의 읍청루(揖淸樓)의 위용이 먼저 드러난다. 재건된 이후에는 비교적 관리가 잘 된 듯 했다. 강당격인 정학당에 오르니 시야가 확 트인다.
멀리 감천(甘川)과 낙동강이 만나는 물길이 내려다보인다. 그러나 마을 바로 앞을 가로지르는 약목과 선산을 이어주는 고가도로가 금오서원의 풍광을 망쳤다. 고가도로로 인해 감천도 낙동강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지리적 환경이 2019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 9곳에 선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산실이었던 길재를 모신 금오서원이야 말로 조선시대의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고가도로 등 번잡스러워진 주변 환경이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렸을 것이다.
금오서원은 도산서원이나 소수서원 병산서원 등 다른 유명(?)서원들에 비해 서원 규모도 단촐한 것으로 느껴졌다. 길재와 그의 후학들이 조선 초기 집권기반을 마련하고 인재를 공급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에 비하면 조선 사림들도 길재를 그다지 후하게 평가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영남은 인재의 산실
사실 길재는 높은 벼슬을 하지도 않았고 성균관의 박사 같은 교육을 하다가 조선개국 후 동문수학한 이방원이 태상박사에 제수했으나 부임하지 않고 낙향했다. '태상박사'는 제사를 관장하는 정육품 하위직이었다. 이방원은 그가 관직을 거부하고 낙향한다고 해서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역성혁명에 반대한 정몽주는 곧바로 죽이면서도 낙향한 길재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내버려둔 것을 보면 그렇다. 그 덕분에 길재는 마음껏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성리학을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 선산은 택리지에 기술한대로 '영남인재의 절반을 배출하는' 인재의 고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산에서 조선 개국 후 문과에 합격한 인원만 36명에 이른다. <경상도지리지>에서 '호학'(好學)의 풍속을 가진 고을로 경주와 상주·진주·성주·김해·밀양·선산·영천·창녕 등 9곳을 꼽았다. 선산은 조선 초기 인재의 보고 인재향(人才鄕)이었다.
길재가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에 은거했던 금오산 자락에는 길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768년 건립한 채미정이 있다. 금오산 올레길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풍경 속에 자리잡고 있는 채미정도 한 번 쯤은 둘러볼만하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du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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