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대추나무, 풍요와 다산의 상징…느긋한 양반나무

대추 생산지로 널리 알려진 경북 경산시 자인읍의 과수원에 대추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경산에서 재배되는 대추나무의 품종은
대추 생산지로 널리 알려진 경북 경산시 자인읍의 과수원에 대추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경산에서 재배되는 대추나무의 품종은 '복조'가 많으며 마른 대추로 쓰인다.

大棗(대조) 볼 불근 골에 밤은 어디 ᄯᅳ 드르며

벼 븬 그르헤 게ᄂᆞᆫ 어이 ᄂᆞ리ᄂᆞᆫ고

술 닉쟈 쳬쟝ᄉᆞ 도라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청구영언』(靑丘永言) 장서각본>

가을 농촌의 풍요와 즐거움을 노래한 '청백리' 황희(黃喜·1363~1452) 정승의 시조다. '대추의 볼이 빨갛게 익은 골짜기에 밤은 어찌하여 떨어지며/ 벼를 베어낸 그루터기에 게는 어찌하여 나와 다니는가/ 술 익자 체 장수 지나가니 먹지 않고 어찌 하겠는가'로 풀이 된다. 빨갛게 잘 익은 대추와 토실토실한 알밤이 지천이다.

여름 내내 논에 살다가 가을에 하천으로 회귀하던 민물 게도 벼를 베 낸 뒤엔 하필 눈에 잘 띄니 이 보다 좋은 안주 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술은 익고 때마침 술 거르는 체 장수도 지나가니 주안상 차리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술은 쌀로 빚기 때문에 흉년에는 담글 수 없다. 추수가 끝난 농촌에 술이 익는 건 풍년을 뜻한다. 밤과 함께 풍요를 상징하는 과실 대조(大棗)는 대추의 한자 본디 말이다.

경북 의성군 금성면 산운마을 한 고택의 담장 너머 대추가 탐스럽게 영글고 있다.
경북 의성군 금성면 산운마을 한 고택의 담장 너머 대추가 탐스럽게 영글고 있다.

◆"대추 세 개로 한 끼 요기"

옛날에는 감나무와 함께 대추나무를 집 마당 가장자리에 많이 심었다. 대추는 밥 지을 때 넣어 먹을 수 있고 비상식량이나 약으로도 쓰인다. '대추 세 개로 한 끼 요기를 한다'는 속설은 대추가 배고픔을 달래는 식품임을 말해준다. 또 백설기와 증편을 비롯한 떡, 삼계탕과 대추전병, 대추차, 정월대보름날 먹는 찰밥과 약밥 등에 없어서는 안 될 식재료다. 사람들이 대추나무를 언제부터 재배하고 그 열매를 이용했을까?

중국 『시경』의 위나라에서 채집된 민요[위풍(魏風)] 가운데 「원유도(園有桃)」 후반부의 "동산에 멧대추 있으니 열매 먹을 만하네[園有棘 其實之食]"라는 구절이 나온다. 대추는 적어도 2천~3천 년 전부터 먹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 기록은 『고려사』의 문종 33년(1079)에 송나라에서 보내온 100가지 약재 목록에 멧대추 씨[酸棗仁]가 함께 수록돼 있다. 또 길례대사(吉禮大祀)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圜丘]의 상 차리는 법식인 진설(陳設)이 나오는데 "제2열에는 개암[榛子]을 앞에 놓고 대추, 흰떡, 검정 떡을 차례대로 놓는다"고 했고, 임금 조상들의 제상[太廟]에는 "제1열에는 소금, 건어, 대추, 밤, 개암, 마름 씨[菱仁]를 둔다"고 했다. 조선시대 종묘제례에도 대추는 빠지지 않는 과실이 됐다. 또 민가의 제례나 혼례에도 반드시 쓰였다.

불과 20여 년 전에만 해도 결혼식 후 폐백에 굵고 좋은 대추를 붉은 실에 꿰어서 그릇 위에 둥글게 쌓아 올렸다. 폐백은 신부가 처음으로 시부모께 큰절을 하고 술과 함께 올리는 예물이다. 대추를 예물로 삼는 것은 일찍부터 스스로 삼가고 공경하는 뜻이다. 아울러 한 나무에 많은 열매가 달리므로 자손의 번창을 바라는 의미도 담겼다.

절을 받은 시부모는 그릇에 담긴 밤과 대추를 신부의 치마폭에 던져주며 다산을 축원했다. 양성평등의 의식이 확산되고 결혼을 기피하는데다가 혼례도 간소화하는 추세에 따라 폐백은 5060의 추억으로만 남게 될 판이다.

대추나무 꽃은 6월말이나 7월초에 새로 나온 가지에서 핀다.
대추나무 꽃은 6월말이나 7월초에 새로 나온 가지에서 핀다.

◆갈매나무과 낙엽활엽교목

대추나무는 갈매나무과 낙엽활엽교목으로 키가 10여m까지 자란다. 옛 사람들은 대추나무를 양반나무라고 젊잖게 불렀다. 다른 나무들이 잎이나 꽃을 한창 낸 5월이 되어서야 천천히 새잎을 내놓는 모습이 느리지만 지조대로 신중한 걸음을 하는 양반과 닮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산간지역에는 6월이나 돼야 겨우 싹이 보이기 시작하여 대추나무 잎이 돋아난 다음에는 늦서리가 없다는 믿음도 생겼다. 하지만 새로 나온 가지의 잎이 연녹색을 띠면 잎 사이사이에 앙증맞은 꽃이 피고 열매는 푸르게 굵다가 9월이면 불긋불긋하게 익기 시작한다. 가을볕에 자홍색이 되면 대추를 수확한다.

『동국세시기』에는 대추를 많이 달리게 하려고 단오에 대추나무 시집보내는 풍속이 나온다. 갈라진 줄기 사이에 돌을 끼우거나 줄기에 상처를 내는데 이는 현대 원예학의 환상박피(環狀剥皮)와 같은 원리다. 잎에서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탄수화물이 돌을 끼운 줄기의 상처 때문에 뿌리 쪽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줄기에 머물러 열매를 충실하게 맺도록 하는 원리다.

대추는 품종에 따라 크기가 확연히 다르다. 위에서부터 사과대추, 복조대추, 멧대추.
대추는 품종에 따라 크기가 확연히 다르다. 위에서부터 사과대추, 복조대추, 멧대추.

대추나무와 비슷하지만 야생에서 자라는 멧대추는 대추나무보다 키가 훨씬 작은 관목으로 3cm 정도의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열매도 대추보다 작고 짧은 타원형이나 원형에 가깝고 씨는 작고 동글동글하다. 대추나무는 한자로 棗(조)이고 멧대추나무는 棘(극)이다.

◆대추나무의 쓰임 벽사(辟邪)

대추나무는 목재가 단단하기로 유명하다. 판자를 두드리면 쇳소리가 날 정도로 다른 나무에 비해 밀도가 치밀하다. 모질고 단단한 사람을 대추나무 방망이에 비유한다. 대추나무의 목재는 찰떡을 치는 떡메, 떡의 문양을 찍는 떡살 등으로 쓰였다. 요즘은 방앗간에서 떡을 만들기 때문에 떡메나 떡살은 박물관이나 민속마을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민예품이다.

대추씨도 망치질해야 부서질 정도로 단단해 어려움을 잘 견뎌내는 야무진 사람을 여기에 빗댄다.

대추나무는 벼락을 맞게 되면 더욱 단단해져 톱으로 쉽게 켜거나 자를 수 없을 정도다. 시중에서는 벽조목(霹棗木)이라고 부르는데 이를 지니고 있으면 요사스런 귀신을 쫓는다는 벽사(辟邪)의 믿음 때문에 액운을 막는 부적과 도장의 재료로 쓰인다. 조선 후기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영기경』(靈棋經)이라는 점술에 쓰이는 12매(枚)의 바둑 돌 모양의 말[棋)을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다"라고 했다.

대구 수성구 황금동의 한 텃밭의 대추나무.
대구 수성구 황금동의 한 텃밭의 대추나무.

대추나무뿐만 아니라 대추도 주술적 도구다. 전염병이 돌면 대추를 실에 꿰어 사립문에 걸어두거나 대추씨를 입에 물고 다녔다. 붉은 색이 악귀를 물리치고 대추나무의 가시를 귀신이 꺼릴 것으로 여겼다. 대추나무를 사람의 출입이 잦은 대문 옆에 심은 이유다.

옛날 대추나무는 주술과 벽사에 동원됐지만 현대에는 문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는 가을에 성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시집 『붉디 붉은 호랑이』, 애지, 2005>

대추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익어가는 과정에 수많은 난관과 아픔을 견딘다. 많은 땡볕 그을리고 찬이슬을 맞아가며 대추는 붉게 물들고 우주의 기운을 온몸에 켜켜이 저장한다. 이런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대추가 그저 맛있는 과일로 보이지 않는다.

"20여 년 전 전원주택과 텃밭을 마련하고 대추나무를 심었는데 어느 해 가을 붉고 둥근 열매가 달린 것을 보고 쓴 시다. 이 시를 잊고 지내다 2005년 처음 시집 『붉디 붉은 호랑이』를 펴내고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시가 내걸리면서 유명해졌다.

중고교 교과서에도 실려 적어도 1천 만 명 이상은 읽었으리라 생각한다. 뜻하지 않는 거액의 저작권료가 생겨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었다." 최근 시인이 SNS에 올린 소회다. 시인이 손수 심은 대추나무의 결실에서 시적 감성을 얻었고 그 시가 '국민 시'의 반열에 올랐다.

대추가 들어가는 재미있는 속담도 있다.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이란 말은 여기저기에 많이 진 빚이나 일이 복잡하게 꼬여갈 때를 비유했다. 잎이 다 떨어진 겨울 대추나무는 잔가지가 많고 가시도 달려 있어서 바람에 날린 연 꼬리가 걸핏하면 잘 걸리고 풀어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작아도 대추 커도 소반'은 크기가 작은 열매 대추의 이름에 큰 대(大) 자가 있고 몸집이 큰 소반의 이름에 작을 소(小) 자가 있다는 뜻으로 상대방의 말을 엉뚱한 말로 재치 있게 눙칠 때 쓰는 말이다.

대추 생산지로 널리 알려진 경북 경산시 자인읍의 과수원에 대추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경산에서 재배되는 대추나무의 품종은
대추 생산지로 널리 알려진 경북 경산시 자인읍의 과수원에 대추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경산에서 재배되는 대추나무의 품종은 '복조'가 많으며 마른 대추로 쓰인다.

◆경산, 조선시대부터 대추 생산

대추나무는 전국에 걸쳐 자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상도에서 대추를 공물로 바치는 지역은 선산도호부, 성주목, 대구군, 경산현, 하양현을 꼽는다. 조선 초기에 이미 경상도 대추가 토산물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경산대추는 오늘날 산림청 지리적표시제 제9호 등록상품으로 전국 생산량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요즘은 사과나 배처럼 생과일로 먹는 '왕대추'나 '사과대추'라는 품종도 농가에서 많이 재배돼 소비자들의 입맛을 유혹한다. 크기가 일반대추의 3~4배 쯤 되고 껍질이 얇아 식감이 부드럽다. 날것은 28브릭스 이상의 당도에다 과즙 또한 풍부해 가을철 다른 과일의 인기 못잖다.

앞에서 언급한 『시경』의 「원유도」는 지은이가 살던 시대를 걱정하는 노래다. 전반부는 '동산의 복숭아'를 후반부는 멧대추를 소재로 삼아 '네 탓'하는 풍토에 울분을 토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 올바르지 않으면 백성의 가슴에는 응어리가 쌓인다. 탄식조의 시가 자못 비장하다. 그래서 뒷부분을 마저 적는다.

마음이 괴로우니 잠시 나라를 여행한다

心之憂矣 聊以行國 심지우의 요이행국

나를 모르는 이는 방자하다고 쑥덕이네

不知我者 謂我士也罔極 부지아자 위아사야망극

저분은 바른데 너는 왜 그러냐 하면서

彼人是哉 子曰何其 피기시재 자왈하기

마음이 괴로움 그 누가 알겠는가

心之憂矣 其誰知之 심지우의 기수지지

그 누가 그걸 알겠는가 차라리 생각을 말자

其誰知之 蓋亦勿思 기수지지 개역물사

나무칼럼니스트 chunghama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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