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0월 18일, 대구관광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는 곧장 구미로 향했습니다. 15일 실시된 제5대 대선에서 개표 초반부터 여지없이 밀리다 16일 새벽이 돼서야 경상·전라·제주에서 나온 몰표로 막판 뒤집기. 15만6천26표 차, 기적같이 윤보선 후보를 누른 벅찬 가슴으로 맨 먼저 고향으로 달렸습니다.
오전 10시 20분, 세단 승용차로 도착한 고향 상모리엔 벌써부터 말끔히 차려 입은 100여 동민이 마을 어귀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평안하셨습니까?" "아주머니 안녕하셨어요?" 박 대통령은 이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해 안부를 묻고는 뒷산 선영(先塋)으로 향했습니다.
상모리 생가에서 선영까지는 1.5km. 비탈길을 구두에 넥타이 차림 그대로 올랐습니다. 양장을 곱게 입은 육영수 여사도 코고무신으로 뒤를 따랐습니다. 논두렁엔 알이 꽉 찬 벼이삭, 산자락엔 흐드러진 들국화. 선거전이 워낙 치열해 이 가을에 이렇게 금의환향(錦衣還鄕)하리라곤 꿈에도 몰랐습니다.
선영은 좌판도 비석도 없이 초라한 그대로. 제물은 통닭 한 마리에 밤, 대추, 탁주가 전부. 박 대통령은 무릎 꿇어 술 한 잔으로 당선을 고했습니다. 다소곳이 지켜보던 육 여사도 며느리에서 이젠 국모(國母)로 큰절을 올렸습니다. 성묘를 마친 박 대통령 내외는 뒤돌아 고향 산천을 한참 내려다 봤습니다.(매일신문 1963년 10월 18, 19일 자)
헐벗은 민둥산, 그 자락으로 구불구불한 논두렁. 옹기종기 앉은 마을은 전봇대도 없는 온통 초가집. 문명이라곤 희미하게 들판을 가로지른 한 줄 경부선 철길 뿐. 1963년 이곳은 여전히 가난한 농촌이었습니다. 저 들판에 가뭄이, 아니면 홍수로 탁류가 무시로 들이쳐 보릿고개를 넘고 또 넘던 유년의 고향, 딱 그대로였습니다.
돌아보면 참 격랑의 세월. 이곳에서 대구사범학교로, 문경에서 교편도 잠시. 만주국 군관학교에서부터 줄곧 군인의 길을 걷다가 무능한 정치, 부패를 보다 못해 민생고를 내손으로 해결하겠다며 유서까지 써 놓고 '군사혁명' 이름으로 정치판에 뛰어든 군정(軍政) 2년 3개월. 이제 떳떳하게 대통령에 올라보니 눈앞엔 모든 게 산더미. 성묫길 내내 사진 속 그의 얼굴엔 말이 없었습니다.
두 달 뒤인 12월 17일, 대통령 취임식으로 제3공화국이 시작됐습니다. 이날은 한국 정치사에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4·19혁명으로 들어선 제2공화국의 의원내각제는 5·16 군사 쿠데타로 11개월 만에 종지부. 헌법을 바꿔 권력은 의회에서 다시 행정부로, 그것도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보다 더 힘이 센 강력한 대통령 시대를 예고했습니다.
박 대통령의 당면 과제는 재건을 넘어 조국 근대화. 가는 곳 마다 큼직하게 쓴 '증산·수출·건설'이 눈앞을 따라다녔습니다. 증산은 경지정리·다단계 개간으로, 수출은 구로(서울)·사상(부산)·제3공단(대구) 조성으로, 건설에는 무엇보다 철강이 필수라며 포항 모래벌에 제철소를 꿈꾼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가난을 벗어보자는 주름진 농민들, 동생 학비를 벌겠다며 공장을 돌리던 여공(女工)들, 가족들이 눈에 밟혀 밤낮을 모르던 산업 일꾼들…. 박 대통령 뒤에는 이렇게 야무진 원군이 있었습니다. 묵묵히 구슬을 꿰, 기어이 헐벗은 강산을 옥토로 바꾸었던 3천만 국민이 있었습니다. 모두 우리의 아버지·어머니, 형님·누이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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