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하순만 해도 미국 정치사회는 예전과 같은 정상(正常)을 회복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기행(奇行)과 말 폭탄의 대가(大家)로 재임 중 두 차례 연방하원의 탄핵소추를 당한 '말썽꾼' 스타일의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도 안 된 2022년 11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그는 올해 3월 초 압도적 기세로 공화당 대선 후보가 돼 복귀했다.
다음 달 5일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의 당선 가능성은 적지 않다. 지난 8~9월 치솟았던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의 지지세가 주춤하고, 트럼프가 경합 주들에서 선전(善戰)하고 있어서다. 분명한 것은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트럼프주의'(Trumpism)에 열광하며 이를 반기는 미국인들이 전체의 절반 가까이 된다는 사실이다. 한국 등 많은 외국의 '희망'과 달리 미국인들은 왜 트럼프주의를 좋아할까?
가장 큰 이유로 미국의 상대적인 국력 쇠퇴와 이에 대한 미국인들의 불안감이 꼽힌다. 2011년 15조달러이던 미국의 국가 부채가 올해 7월 하순 35조달러(약 4경7천610조원)를 사상 최초로 돌파한 게 그 방증이다. 미국 정부가 올해 지불해야 하는 이자(利子)만 1조달러에 육박하는데, 이는 총국방비를 웃돈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80% 선에 육박하며 미국을 바짝 추격하는 중국도 큰 위협이다. 14년 연속 제조업 세계 1위인 중국은 재래식과 핵·첨단 군사력 확대를 필두로 당과 국가 전체가 미국 추월 총력전에 나서고 있다. 양국의 조선(造船) 건조 능력 격차가 1대 233(미국 해군정보국 조사)으로 벌어져 중국의 해군력은 조만간 미국보다 우위에 설 전망이다. '지쳐 가는 미국'을 다시 강하게 만들겠다는 트럼프의 구호가 민심을 얻고 있는 것이다.
2009년 취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이후 가속화된 미국 사회의 리버럴·좌파화에 대한 반발도 빼놓을 수 없다. 민주당 정부가 의도적으로 밀어붙이는 동성애자·성전환자 같은 성소수자(LGBTQ)들에 대한 관용과 장려 정책이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스스로 LGBTQ"라고 대답하는 미국인은 2023년 기준 미국 총인구의 7.6%로 2012년(3.5%) 대비 11년 만에 두 배 넘게 늘었다. 1997~2003년에 태어난 Z세대에서는 성소수자 비율이 20%를 넘었다.(갤럽 조사)
보수우파 시민들과 일부 주 의회들이 'LGBTQ 조장 반대' 집회를 열고 성소수자 옹호 도서를 금서(禁書)로 지정하는 캠페인을 벌이자, 좌파 성향 주(州)와 정치인들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신(神)'의 창조성과 "인간 사회에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개의 성 정체성만 존재한다"는 관념을 전면 부정(否定)하고 있다. 보수 진영에선 좌파의 공세로 미국을 지탱해 온 가족과 기독교 정신,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의 현재 및 미래상과 삶의 방식을 놓고 좌우파 진영이 '문화 전쟁'(culture war)을 벌이는 가운데, 우파는 트럼프를 정치적 동지(同志)이자 동맹으로 택했다. 이들은 카리스마와 정치력을 지닌 트럼프를 우파 정신의 구현자로 믿고 지원하고 있다. 트럼프는 공화당 소속이면서 정치적 신념과 가치관에선 민주당을 사실상 추종했던 밋 롬니, 존 매케인 등 기성 정치인들과 뼛속부터 다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트럼프는 세계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고 생활고를 겪는 백인 노동자들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삼고 교감하며 그들에게 도움 되는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그의 정치 철학은 해외 개입 최소화와 국내 노동자·중하류층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트럼프주의가 시민들의 호응을 얻자, 바이든 정부는 물론 해리스 후보까지 트럼프가 내놓은 무역·세금·에너지 개발·외교 정책의 상당 부분을 수용해 닮아가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최신호는 "올해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트럼프 스타일이 공화당과 민주당의 어젠다를 재정의(再定義)했다"며 이를 '미국 정책의 트럼프화(Trumpification)'라고 명명했다. 이는 올해 대선에서 트럼프가 패하더라도, '트럼프주의'가 사라지기는커녕 더 넓고 깊게 뿌리내릴 것임을 시사한다. 한국 정부와 국민들도 미국의 이 같은 구조 변화를 정확하게 읽으면서 유일 동맹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우리의 역할과 사명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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