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신언서판'과 '사의재'가 가르치는 '말'

엄재진 북부지역 취재본부장

엄재진 북부지역 취재본부장
엄재진 북부지역 취재본부장

요즘 정치판은 '명태균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분위기다. 한 정치 브로커의 말이 연일 언론 주요 뉴스를 장식하고, 국회 국감장은 '명 의혹'을 둘러싼 여야 공방으로 변질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생소했던 한 명의 정치 브로커의 말에 여권 전체가 소용돌이에 빠졌다. 대통령 부부와 용산 대통령실, 여의도 국회를, 나아가 한 나라의 정치를 제 손아귀에서 쥐락펴락한 것으로 떠들고 있다.

온갖 의혹에도 '감히 나를 잡아갈 수 있는지 두고 보자'는 식으로 폭로를 이어가고 있다.

벌써부터 명 씨와 연루된 정치인이 20여 명에 달하고, 이들을 둘러싼 의혹들도 불거지기 시작하면서 정치가 아사리판으로 전락하고 있다.

정치인의 말은 군인의 총칼과 같다. 우리는 말 한마디로 정치판에서 사라졌던 숱한 정치인들을 보았다. 대중을 감동시킨 말(연설)로 세계적 정치 지도자가 된 사례도 알고 있다.

우리가 한 번쯤은 들었을 '신언서판'(身言書判)은 중국 당나라 때 관료를 발탁하던 4가지 기준을 말한다. 사람의 용모와 말, 글과 판단력을 의미한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 살았던 집이 '사의재'(四宜齋)다.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담백한 생각, 엄숙한 용모, 참을성 있는 말, 진중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언서판'과 '사의재'에는 모두 '말'이 포함돼 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준다. 특히 정치인은 말을 잘 해야 한다. 정치인의 말은 진실을 담아야 하고 정직해야 한다.

최근 안동 지역에서도 정치인들의 '말'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정치인의 말'과 '책임'이 등식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대부분이 인정하고 있지만, 정치인의 말에는 책임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얼마 전 안동시 도산면 의일리 '폐기물 재활용시설'을 둘러싼 김형동 국회의원의 말은 행정 불신을 넘어 주민과 행정의 갈등을 부추겼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김 의원은 시설을 반대하는 주민 집회에 참석해 "반드시 중단시키겠다"고 말했다. 또 지역 언론인과 만난 자리에서는 "'환경부 장관에게 중단시켜야 할 불법 사례를 찾아라. 그게 없으면 앞으로 중단해야 할 이유를 내놓아라'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이 과정에서 김 의원은 업체와 행정 간 검은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 확신하는 듯한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추측'과 '의혹'으로 사업 중단을 단언했다.

권기창 안동시장은 '욕설'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노점 정비 과정에 불만을 품은 노점상이 권 시장에게 심한 욕설을 들었다고 주장한 것. 권 시장은 "'욕설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라 해명하고 있다.

양측의 주장이 엇갈린 상황에서 대중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이미 몇몇 언론과 욕설 파문을 퍼 나르는 몇몇 시민 등 메신저들의 말에만 관심을 보인다. 그만큼 정치인은 '말'을 둘러싸고 일방적 공격에 노출되기도 한다.

이처럼 정치인들의 말은 자칫하면 '의혹'과 '논란'으로 이어진다. 공자는 현란하게 말 잘하는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정치꾼이 아닌 정치인을 원한다. 현란하고 대중을 혹하게 하는 말보다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정치인은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고, 정치꾼은 자신을 위해 나라를 이용하는 사람"이라 했다. 또, 영국 경제학자 콜린 클라크는 "정치인은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만, 정치꾼은 다음 선거만 생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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