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누가 이 거룩한 터를 그냥 두랴

정인열 대구가톨릭대학교 부교수

정인열 대구가톨릭대학교 부교수.
정인열 대구가톨릭대학교 부교수.

"대구에서 천주교인과 천도교인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이 갇혔다가 형장으로 끌려가 이슬로 사라진, 순교(殉敎) 또는 순도(殉道) 그리고 순국(殉國)의 거룩한 길을 걸었던 역사를 간직한 곳은 어디인가?"라고 물으면 혹 떠오르는 곳이 있는가? 바로 대구읍성 안에 있던 경상감영의 감옥이다.

옛날 경상도(영남)는 오늘날의 경상남북도와 대구시, 부산시, 울산시 지역을 아울렀고 경상도를 관할하던 관공서인 경상감영은 1601년부터 대구에 설치됐다. 이곳에서는 경상감사(관찰사)가 주재한 재판도 열렸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죄인들은 감옥에 갇혔다. 그 감옥은 대구읍성 내 북쪽 한 모퉁이인 서소문 안쪽 옥동곡(獄洞谷)이란 곳에 위치했다. 오늘날 서문로교회가 있는 자리이다.

이곳의 감옥은 뒷날 읍성 안 동쪽 선화당 가까운 곳으로 옮겨졌다. 또 감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재판소가 위치했다. 그리고 이 감옥은 한때 경찰의 업무였던 관계로 경찰서와 감옥이 선화당 옆의 한 울타리 안에 자리를 잡게 됐다. 이런 경찰과 감옥의 '동거'는 경찰의 이전(현 대구중부경찰서 자리)으로 끝이 났다. 감옥 역시 뒷날 현재의 삼덕교회가 있는 곳으로 이전되면서 경상감영 자리를 떠났다.

이런 사연의 대구감옥이 경상감영에 있을 때, 조선 후기 천주교에 대한 박해 시기 경상도의 천주교인들이 끌려와 옥살이를 했다. 가혹한 고문과 굶주림 등으로 감옥에서 죽은 교인들도 적지 않았고, 이윤일(성인 추존) 같은 신자는 형장으로 끌려가 삶을 마쳤다. 이후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도 이곳 감옥에서 수난을 겪었다. 특히 동학 창시자 최제우 교주는 앞서 1864년 4월 15일 이윤일(1867년 1월 12일)처럼 남문 밖 형장(오늘날 반월당)에서 처형됐다. 이들의 뒤를 이어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운동과 독립투쟁에 나선 영호남 의병(장)과 독립투사도 이곳에 투옥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기존 체제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거나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혹은 빼앗긴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한국인 민중들의 고귀하고 거룩한 정신이 깃든 곳이 바로 감옥이 있던 경상감영인 셈이다. 자신보다 대의와 명분을 위해 목숨조차 아끼지 않고 삶을 버린 숱한 민중들의 정신이 어린 경상감영은 바로 역사교육의 산 현장이자 역사 문화자산이기도 하다.

필자는 임삼조 계명대 교수와 김태훈 영남중 역사 교사와 함께, 대구 중구청과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산학연구원에 의뢰해 지난 8월에 펴낸 『경상감영 400년-대구를 빛낼 미래 문화유산』 발간 작업에 참여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문헌 및 연구의 부족으로 완벽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혼란스러웠던 대구감옥의 변천사와 감옥에 얽힌 많은 사연의 일부나마 알게 되었다.

아울러 필자는, 경상감영 내 한 모퉁이에서 시작된 대구감옥에 서려 있는 이종교인(異宗敎人)의 숭고한 순교 정신과 나라를 찾기 위한 영호남 독립운동가의 순국 역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례라는 점에서, 경상감영의 가치를 다시 살펴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현재 대구에는 이들을 개별로 기리는 기념물이나 시설, 조형물, 공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세 요소를 아우르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이참에 대구 중구청이나 대구시에서 경상감영의 이런 역사 자산에 바탕한 무엇인가를 하나 정도 마련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경상감영 공간의 의미를 더해 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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