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22>고등어 이야기(下)…안동간고디를 찾아서

간잽이 대명사 이동삼 스토리
영광 법성포에 가면 굴비 정식 취급하듯 안동은 내륙임에도 원형의 간고디 판매
영덕과 80여㎞ 거리 바지게꾼 1박 2일간 구시장까지 져 날라 소금투하결정책임
묵직한 간 자반생선 지역민 남다른 사랑 염장될수록 맛 짤깃 거의육포씹는느낌

내륙에 있는 안동은 영천과 함께 국내 자반 생선의 메카 구실을 한다. 강구에서 안동으로 운송되는 과정에 간잽이들이 염장시킨 안동간고디는 냉장 시설이 없던 그 시절 염장과학이 절묘하게 녹아들어가 있다.
내륙에 있는 안동은 영천과 함께 국내 자반 생선의 메카 구실을 한다. 강구에서 안동으로 운송되는 과정에 간잽이들이 염장시킨 안동간고디는 냉장 시설이 없던 그 시절 염장과학이 절묘하게 녹아들어가 있다.

간고등어. 안동에서는 '간고디'라 한다. 당연히 국수는 '국시'라 해야될 것이고. 내륙임에도 불구하고 안동은 간고등어와 함께 문어까지 특수를 일으킨다. 영천도 '상어 돔배기 1번지'. 간고등어와 돔배기는 경북 대표격 자반 어종이랄 수 있다.

영광 법성포에 가면 웬만한 식당에서는 '굴비정식'을 다 취급한다. 안동도 마찬가지. 이름만 조금씩 달리할 뿐 저마다 원형의 간고디를 판다고 홍보한다. 그래서 어느 간고디가 안동대표격이라 말하기 참 뭣하다. 악덕 상혼이 아니라면 다들 안동 대표 간고디라 해주자. 참고로 2007년 안동 내 11개 간고등어생산업체 관계자가 모여 협의회를 만들고 '청어당'이란 상표를 갖게 된다.

간고디 이야기할 때 절대 빠지면 안 되는 인물이 있다. 이젠 간잽이 대명사가 되어버린 '이동삼'. 그를 보면서 이런 독백을 한 게 기억난다. '간잽이라면 적어도 이 양반처럼 생겨 먹어야 되지 않을까? 브라보, 정말 타고난 포스야!'

그는 2016년 세상을 등졌다. 그의 이름은 아직 간고디 옆에 찰싹 붙어 다닌다.

미스터 고등어로 살다간 간잽이 대명사 이동삼 씨. 2016년 타계했다.
미스터 고등어로 살다간 간잽이 대명사 이동삼 씨. 2016년 타계했다.

◆10단계 공정을 거쳐야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산공동어시장 고등어가 사용되는데 해동해서 내장을 제거하고 물간과 습간 등 모두 10단계를 거쳐야 완성된다. 고기 상태에 맞는 정량의 소금. 막상 소금을 집어 넣어보면 적당량을 채워 넣기가 매우 어렵다.

타 도시의 고등어는 그냥 소금물로 염장한 정도이지만 안동에서는 소금으로 잘 숙성시킨다.

지금 우리가 먹는 간고등어는 너무 밍밍하다. 간이 얇다. 진짜 소태급 간고등어와는 상당한 염도 차이가 있다.

여기서 우린 욕지도의 '간독문화'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고등어가 본격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그때 욕지도가 고등어 메카로 발돋움한다. 통영에서 32㎞ 떨어진 국내에서 48번째로 큰 섬인 욕지도. 욕지도는 근대어촌 1호였다. 잡힌 고등어는 집집마다 딸려 있는 시멘트로 만든 '간독(간을 해서 보관하는 독)'에 보관했다. 가로세로 3m, 어른 키 정도의 깊이를 가졌다. 가장 큰 간독에는 4만 마리 정도를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욕지도 고등어 특수가 사라진지 오래다. 한국 근대어촌 발상지인 욕지도 좌부랑개 '고등어마을'로 거기가면 하나 남은 간독을 볼 수 있다. 바로 제명수 씨 집에 야외 전시장 식으로 남겨 두었다. 전성기 때만해도 어선이 500여척, 운반선이 290척이 집결해 있었다. 고등어 어군이 제주도 남쪽으로 남하하면서 고등어 파시도 쇠퇴해버린다. 이후 횟감용 고등어 해상 가두리 양식장의 메카로 급부상한다. 내륙의 고등어 횟감은 거의 여기서 공수된다고 보면 된다.

근대어촌의 발상지로 불리는 욕지도 좌부랑개 고등어마을에 남아 있는 간독은 한 개. 관광객을 위해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근대어촌의 발상지로 불리는 욕지도 좌부랑개 고등어마을에 남아 있는 간독은 한 개. 관광객을 위해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여기는 안동과 염장하는 방식이 좀 달랐다. 고등어 배를 갈라 소금물에 씻은 후 가마니에 얹어 간독 옆에 두고 소금을 한 줌씩 크게 얹어 간을 한다. 간을 한 고등어는 간독에 나무로 깍은 판재(이다)를 세우고 고등어를 이다 줄에 맞추어 차곡차곡 잰 후 종이로 50cm 이상의 상급 고등어는 1번(얼굴이 비칠 정도), 덜 비치는 중급은 2번, 아예 안 비치는 일반 고등어는 3번으로 표시해둔다. 숙성 여부는 스며나오는 핏물의 빛깔을 보며 판단한다. 20일 정도 지나면 타지로 팔려나간다. 멀게는 낙동강 수운을 따라 안동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남해의 고등어는 욕지도, 동해의 고등어는 안동을 축으로 벨트를 형성한 셈이다.

◆일약스타가 된 간잽이

이동삼의 삶을 보면 사람 팔자 정말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는 제대 후 60년대 후반부터 옥야동 중앙신시장에서 발품을 팔기 시작한 일개 장꾼에 불과했다. 짐자전거 타고 간고등어 배달하던 평범한 자전거짐꾼이었다. 그런데 1999년쯤 그에게 럭키한 일이 생긴다. 오늘의 안동탈춤의 모양새를 잡은 전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사무국장이었던 권두현과 <주>안동간고등어 초대 대표이사였던 류영동, 지역 신문에 있었던 모 기자 등이 '이동삼 간잽이마케팅'에 나선 것. 97년 안동탈춤페스티벌에 상응하는 향토특산품이 절실했고, 회심의 일격이 바로 간고디였다.

안동이 내륙이란 게 '신의 한 수'였다. 영덕과 안동 사이는 80여㎞, 이 거리를 예전 바지게꾼들이 손수 영덕 강구권의 고등어를 직접 안동 구시장까지 져 날라야만 했다. 1박 2일의 고된 일정이었다. 붉은 속살 생선은 잘 상한다. 그래서 개천을 킨 언저리에서 배를 열고 소금간을 해야만 했다. 이때 최고 승부사는 당연히 간잽이. 그들은 투망을 지시하는 '어선장' 같은 존재다. 언제 소금을 투하해야 될 지를 결정한다.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내장을 제거하고 빈 복부에 굵은 소금을 집어넣는데 무르기에 따라 소금의 양도 달라진다. 소금이 한쪽으로 쏠리면 안 된다. 왼손으로 대가리를 꽉 잡고 오른손은 힘을 빼고 손목의 감각으로 소금을 친다.

고기의 크기, 무르기, 기후 조건 등에 따라 사용되는 소금의 양은 매번 달라진다. 그 안목을 간잽이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고기의 크기, 무르기, 기후 조건 등에 따라 사용되는 소금의 양은 매번 달라진다. 그 안목을 간잽이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개통된 안동~영덕고속도로 덕분에 통행 시간이 채 1시간도 안 걸리지만 그 시절에는 하루 만에 올 수 없는 거리였다. 운송 수단은 소·말 달구지와 일반 지게보다 다리가 짧은 바지게였다.

◆환희식당을 아시는가

영덕 오십천 구간을 지난 간잽이들은 두 고개를 넘어야 한다. 바로 황장재와 임하댐을 품은 임동 챗거리. 황장재 초입에는 원전리 주막촌이 있었다. 이제 그 언저리에는 '환희휴게식당'이 있다. 황장재를 내려오면 청송의 명물 신촌 약수촌이 나온다. 일행은 여기서 목을 축이고 영덕~안동 중간 지점인 진보면 월전리 마방 봉놋방에서 하루를 묵는다.

간잽이들은 쉬어도 마냥 쉴 수가 없다. 간고등어 관리 때문이다. 바람과 햇살 정도를 봐가면서 짚으로 만든 거적을 열기도 하고 덮기도 했다. 월전리에서 다시 백릿길을 더 가야 한다. 다시 가랫재를 지나면 기념비적인 안동간고디 탄생지가 나타난다. 바로 '임동 챗거리장터마을'.

간고등어는 마치 흑산도에서 잡힌 홍어가 최대 소비처인 나주로 오면서, 동해 묵호, 주문진 등지에서 잡힌 참문어가 태백선에 실려 영주로 오면서 특유의 향미를 갖게 되는 것과 비슷한 조건이었다. 육지가 발효시킨 '육어'(陸魚)랄까.

냉장고 등장 전에는 소금간이 식문화의 근간이었다. 특히 대구경북은 유달리 소금간이 묵직하게 들어간 자반 생선에 환장했다. 선창에서 고등어를 구입한 사람들은 당시 냉장고 구실을 했던 장독에 파묻어둔다. 이를 우리 지역에서는 '제자리간'이라고 한다. 잘 염장 된 간고등어는 상당히 짤깃한데 거의 육포 씹는 맛이다. 요즘 간고등어구이보다 몇 배 더 딱딱하다.

자반 문화는 거의 사라졌다. 일부 모듬 생선 전문 식당에서 자반 흉내를 내지만 염도가 너무 낮다. 나도 그 시절 자반고등어를 좋아한다. 단골 식당 중 한 군데인 방천시장 내 '엄마손식당'에 가면 그런대로 예전 물성을 건질 수 있다.

아무튼 예전 추억의 챗거리 현장은 임하댐에 수몰돼 사라져버렸다. 대신 그 언저리에 캠핑장 등 다양한 레포츠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 동력을 이용해 임동호수축제(올해 4회)를 만들었다.

안동고등어축제 일환으로 시연을 보인 달구지로 간고등어 이송 장면. 안동시 제공
안동고등어축제 일환으로 시연을 보인 달구지로 간고등어 이송 장면. 안동시 제공

◆일본 고등어길

강구~안동처럼 일본에도 고등어길이 있다. 거리도 거의 같다. 일본 후쿠이현의 오바마(小濱)에서 교토에 이르는 구간. 와카사(若狹)만에서 고등어를 잡아 그것을 교토까지 등짐으로 운반했다. 한 사람이 등짐으로 운반하는 양은 30㎏ 남짓. 그런데 일본의 경우 생선을 염장하지 않고 그대로 교토까지 갖고 온다. 그 고등어가 바로 '시메사바'가 되고 그 맛을 경험하려면 니시키시장 한 켠에 있는 '이우마타'(伊豫又)에 가면 된다. 1617년에 개업했다. 이들은 2월에 고등어를 소금에 절여 나무통 안에 넣었다가 여름 장마 때 꺼내 먹는다. 현재 일본 최고의 고등어는 오이타현의 사가노세키 바다에서 잡힌 '세키사바'. 비쌀 때는 마리 당 3만~4만 원.

◆ 문화콘텐츠마케팅 대상이 된 간고등어

소금이 중요했다. 전라도 신안군 천일염이 경상도로 오는 건 교통 때문에 기대할 수 없었다. 거의 낙동강 하구 부산시 사하구 명지에서 생산된 낙동강 자염이 주류를 이룬다. 낙동강 소금배는 낙강과 동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나룻터인 개목나루에서 멈춰선다. 더 위로는 강이 험하고 수심이 얕았기 때문이다. 낙강은 황지에서 발원하고 동강(반변천)은 일월산에서 발원한다. 낙동강 소금배의 북방한계선은 바로 안동. 안동시에서 그걸 기념하기 위해 두물머리에서 축제도 벌인다.

하댐으로 인해 챗거리간고등어문화와 간잽이 명맥도 끊어질 뻔했다가 뉴밀레니엄을 맞이할 즈음 안동에서 문화콘텐츠마케팅상품으로 부활된다.

처음부터 이동삼을 택한 건 아니다. 한 할머니를 간잽이로 내세웠다. 그런데 할매 집안 반대로 대타로 찾은 사람이 바로 이동삼. 그는 간잽이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멘토가 필요했다. 중앙신시장 '신시장해물' 여사장 등으로부터 많은 걸 전수한다.

급기야 안동간고디를 띄우기 위해 관계자들이 도원결의를 한다. 일단 옥야동 중앙신시장 앞에 콘테이너를 갖다놓고 '안동식품'이란 간판을 걸었다. 마케터들은 이동삼을 간잽이 캐릭터로 정착시키기 위해 보부상용 패랭이를 씌운다. 그리고 수시로 상회 앞에 앉아서 소금을 뿌렸다. 관광객에겐 이색 광경이었다.

안동간고디와 안동 전통음식을 절묘하게 매칭시킨 예미정의 간고디 밥상.
안동간고디와 안동 전통음식을 절묘하게 매칭시킨 예미정의 간고디 밥상.

2011년 안동간고디축제가 론칭된다. 그가 타계한 뒤 식객의 만화가 허영만이 네이버를 통해 K-fish 웹툰, '안동간고디'를 연재한다. 안동간고등어는 곧 '안동종가음식사업호사업단'을 탄생시킨 '예미정'이란 브랜드와 시너지효과를 일어킨다. 퓨전 한옥레스토랑 같은 정상동의 예미정에서 안동식혜, 배추전, 부추콩가루찜 등 안동 전통의 맛이 가미된 간고디정식 메뉴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모르긴 해도 국내에서 가장 성공적인 푸드마케팅으로 기록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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