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역사(驛舍) 동대구로 이전" 1967년 11월 12일, 극비의 '대대구 건설' 청사진이 베일을 벗었습니다. 핵심은 1968년 말 준공 목표로, 화물역으로 건설중인 동대구역을 여객전용으로 바꾼다는 것. 이에 따라 1969년 새해부터는 동대구역에서 여객업무를 보고, 대구역은 화물만 취급하다 평리동에 화물 전용역 신설 후 아예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철도는 남북 분할, 신천은 동서 분할'. 여객용 동대구역 건설은 대구 시가를 동쪽으로 확장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인구는 느는데 도심은 비좁아 중앙통(로)을 넓히려다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황무지나 다름없던 구릉지 신천·신암·효목동은 새로운 황금시대로, 개발에 포함된 수성·범어·만촌 들판마저 땅값이 들썩했습니다.
1년이 지난 1968년 12월 25일, 하늘에서 본 동대구역사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여객 업무를 볼 새해가 코앞인데 역사 본관은 아직도 골조 공사. 주택과 상업지구를 겸한다는 신천동은 허허벌판. 논밭 사이로 낸 도로는 먼지가 풀풀 날렸습니다. 1966년 7월 16일 동대구역 기공식을 하고도 기반 공사가 늦어져 지난 6월 25일에서야 역 본관을 착공했으니 연말 준공은 누가 봐도 역부족. 새해부터 이곳에서 기차타기는 다 틀렸습니다.
그해 12월 27일 밤, 철도청은 부랴부랴 동대구역장에게 '영업개시 보류'를 통보하고 대합실에 내건 열차 시간표도 뜯게 했습니다. 1층 만이라도 완공해 새해엔 틀림없이 업무를 보겠다던 약속은 결국 헛말이 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9일엔 받침대가 틀어져 공사중인 본관 2층 옥상 슬라브가 무너지고, 강추위로 공사마저 중단돼 '동대구역 시무(始務)'는 해를 넘기고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간 건 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대대구 건설'을 지원하겠다던 정부 공약은 번번이 예산에서 제외됐습니다. 1967년 상반기에 착수키로 한 동서관통로(현 달구벌대로), 1968년 말까지 계획한 제3공단 조성도 지지부진. 1968년 4월에 첫 삽을 뜨려 했던 신천 동부지구·신암지구 구획정리는 5개월이 지나도록 손도 못 댔습니다.
시장, 부시장, 국회의원들은 안달났습니다. 정치적 고향 대구를 음양으로 지원했던 박정희 대통령도 도리 없었습니다. 이유는 제2차(1967~1971)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3년 반 만에 끝내자는 통에 이쪽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 일이 태산인데 돈줄이 막혀 신문 지상엔 '대대구 건설 휴지화'란 탄식이 쏟아졌습니다.
대구시는 시유지인 서문시장과 교동시장을 민간에 팔기로 했습니다. 서문시장은 1만2천1백55평 중 도로를 뺀 8천평(26,446㎡), 교동시장은 4백56평 가운데 3백평(992㎡). 이렇게 해서 마련한 55억원을 대대구 개발에 쓰기로 했습니다.
1969년 6월 9일, 우여곡절 끝에 동대구역이 준공돼 이날 오후 3시 역 광장에서 시무식이 열렸습니다. 구경 나온 시민들이 1만여 명. 넓은 광장이 명절처럼 붐볐습니다. 10일 0시 46분, 한밤 적막을 뚫고 동대구역에 첫 기적이 울렸습니다. 연한 마찰음을 내며 도착한 열차는 부산발 서울행 보통급행 '은하'호 였습니다. ( 매일신문 1966년 2월 18일~1969년 6월 11일 자)
동대구엔 신도시, 서대구엔 제2공단(성서), 남대구엔 두류산 종합대공원, 북대구엔 제3공단…. 강계원 시장(1964.1~1966.5)이 설계하고 태종학 시장(1966.5~1969.10)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던 대대구 건설. 동서관통로 공사가 늦어지면서 제2공단 건설은 보류됐지만 동대구역은 청석받이 구릉지 신천 동부를 신시가로 탈바꿈 시킨 일등공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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