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배신(背信)의 불길’은 오래 타오르지 못했다

최경철 편집국 부국장 겸 동부지역 취재본부장
최경철 편집국 부국장 겸 동부지역 취재본부장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나아가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背信感)이 불길처럼 퍼져 가는 것이 제 눈에 뚜렷이 보인다." 기자가 청와대를 출입하던 2020년 9월 6일,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페이스북 글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요즘도 전 국민 지원 얘기를 하는 이 지사는 그때도 코로나19 피해 구제를 위해 2차 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을 주장했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이낙연 당시 민주당 대표의 '선별 지급이 신념'이라는 의견을 받아들이자 '배신의 불길'이라는 단어를 꺼내 놓으며 문 대통령과 민주당을 때렸다. 문 정부와의 차별화(差別化)를 노린 것으로 풀이됐다. "해당 행위" "분열·갈등 조장"이라면서 민주당원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영리한 이 지사는 '배신자' 프레임에 갇히자 이내 꼬리를 내렸다. "최종 결정에 성실히 따를 것이고 이는 변함없는 나의 충정"이라는 글을 다시 올렸다. 이후 이 지사는 문 대통령과의 뚜렷한 차별화 노력을 하지 않았고 결국 이낙연 대세론을 무너뜨리고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됐다.

이 지사의 즉각적 후퇴를 두고 몇몇 청와대 관계자들이 한 사람을 소개하며 원인 분석을 해 준 기억이 떠오른다. 노무현 정부 당시 초대 통일부 장관을 지내면서 '노무현의 황태자'로 불렸던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다. 그는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에 나섰고 대선 후보까지 됐지만 이명박 후보에게 대선 사상 역대 최다 표차로 참패했다. 배신의 불길 위에 섰다가 낭패를 본 정동영이라는 이름이 이 지사의 머릿속에 호명되면서 태도 변화가 나온 것이라는 게 그때 청와대 사람들의 해석이었다. 한국 정치의 대표 경로(經路)는 대통령과의 차별화에 나섰던 인물들은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박근혜 대통령은 다른 경로를 만들었다는 분석도 나오지만 박 대통령은 적극적인 차별화의 결과가 아니라 이 대통령이 후계자를 끝내 찾지 못하면서 재부상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정치학자들은 '결빙(結氷) 효과'라는 말까지 써 가면서 꽁꽁 언 얼음처럼 강력한 경로 의존성을 주장한다. 그런데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김건희 여사 문제를 두고 윤석열 대통령과 대립하며 이 경로를 바꾸려 한다. 그 명분이 쇄신과 변화라고 한다. 하지만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현실적 수단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 임기가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의 차별화는 빙하를 깨뜨리려는 무모함 그 자체다. 여당(與黨·government party)은 그 이름이 말해 주듯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과 한짝인데 여당 대표가 대통령을 흔들면서 갈등을 바깥으로 노출하고도 정권 재창출을 한 사례는 없었다.

더욱이 한 대표의 지금 행동은 안보 위기·경제 불황 등 나라 안팎의 무수히 많은 긴급 현안을 온통 제쳐 두고 오로지 김건희 여사만 부각시키는 야권의 '갈등(葛藤) 사유화(私有化)'에 동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심지어 특별감찰관 임명 요구에서 한 대표가 보여 준 행태는 민주공화국 통치자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먼 검사적 관행인 일도양단(一刀兩斷)의 모습이다. 한 대표는 김 여사 문제는 물론, 현안에 대해 공적 이성을 통해 물밑에서 대화·토론하면서 절제와 인내, 균형감을 갖고 갈등 해결에 나서야 한다. 오래 타오르지 못했던 배신의 불길에 그의 행보를 맡긴다면 자신의 미래를 암울하게 하는 것은 물론, 야권이 노리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지옥문을 열어 주는 어리석음을 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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