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변사(辯士)의 입만 쳐다볼 텐가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1926년 10월 단성사에서 무성영화 '아리랑'이 상영됐을 때 1938년까지 흥행을 이어갈 거라 예상한 이는 드물었다. 작품성을 폄훼한 게 아니었다. 무성영화의 특성 탓이었다. 소리가 나오지도 않는 판에 연기파 배우들의 웬만한 표정 연기가 아니라면 관객의 주의를 시종일관 묶어두기 어려웠다. 난제를 해결한 건 변사(辯士)였다. 대본을 좇아 읽는 역할이 아니었다. 무성영화의 전능한 창조주나 마찬가지였다.

화면 상황을 적당히 그러나 자극적으로 설명할수록 유능했다. 관객의 귀에 착착 감기니 제작자의 의도와 무관한 일방적 언설도 가능했다. 떠도는 이야기를 정연(井然)하게 연결해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도 실제 있었던 일이라 믿기 마련이었다. 짐작하건대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도 하루가 멀다하고 왕비를 죽였던 샤리아르 왕이 자신의 말을 믿고 있다는 걸, 자신이 죽지 않을 걸 몇 달 만에 알았을 것이다.

변사의 맛깔나는 해설은 추임새 정도에 머무르지 않았다. 변사가 마음먹은 대로 영화의 장르가 바뀔 수도 있었다. 배우의 대사를 관객이 직접 듣지 못해서였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리 좋더란 말이냐"라는 변사의 대사로 유명한 영화 '장한몽(長恨夢)'에 신태식이라는 가명으로 주인공 이수일 역을 맡았던 심훈(소설 '상록수'의 저자가 맞다)은 변사의 해설을 강하게 비판했는데 "배우의 이름을 얼토당토않게 부르는 것은 고사하고… (중략) 희생(犧牲)을 희성, 쇄도(殺到)를 살도로 읽는 따위는 너무나 상식을 지나는 일"이라 꼬집기도 했다.

일련의 비판들을 견디지 못하고 1930년대 후반부터 변사의 전성시대는 저물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이들 중에 만담가가 있었다. 해방과 동시에 이들은 여론을 선도하는 기수(旗手)라 자처하며 지방 순회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1946년 1월 미 군정 정보처는 대구에서 열린 만담가 신불출의 공연을 "한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며 만담가인 신불출은 대구 공보관에서 공연했으며 공연을 마치면서 해머와 낫이 그려진 적기를 휘날렸다. 그러면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조선인이 염원하는 독립으로 이끌 것이라고 외쳤다"고 보고했다.

신불출은 일제강점기부터 풍자와 해학으로 인기를 얻은 바 있었다. 일제의 정책을 조롱하는 대담한 만담으로 유명했고 해방 후 좌익 계열인 조선영화동맹에 가입했다. 좌익 활동을 이어간 그는 같은 해 6월 김두한(김좌진 장군의 아들)의 총격을 받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1947년 월북(越北)했다. 1960년대 초 대본 검열 등 통제적인 북한의 문화정책을 비판한 뒤 숙청됐다.

변사와 만담가의 시대가 재현(再現)되는 듯하다. '명 박사'라는 이와 영부인의 과거 메신저 대화 내용이 정쟁 공세의 재료가 됐다. 실제로 보이는 대화 내용과 다른 해석이 나왔다. 영부인이 "철없이 떠드는 우리 오빠 용서해 주세요"라고 한 건 윤석열 대통령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다. 남편을 당연히 '오빠'라고 부른다는 황당한 근거였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일부에서 통했다.

남편을 '아저씨'라 부른다는 영부인의 해명은 귓등으로 넘겼고 '명 박사'라는 이의 해명이 오락가락하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유야무야 넘겼다. 한쪽의 주장이나 추정을 단단한 근거로 삼는 건 위험하다는 걸 분명 알 텐데 거듭 인용한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변사가 많으면 배가 우주로 갈 수도 있다. 또 그 배로 우주 개척 시대를 연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물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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