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청년 음악가 이병주가 대구 최초로 열었던 '오리엔트 레코드사'는 뜻밖에 '전쟁가요'의 산실이 되었다. 6·25전쟁이라는 최악의 문화예술 암흑기에 대중가요사에 기념비적인 노래들을 양산하는 전성기를 누렸다. 참혹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가요사의 공백을 잇는 찬란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시대가 파생(派生)시킨 역설의 공간이었던 이곳은 대구로 피란 온 연예인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이재호, 강사랑, 박시춘, 유호, 이인권, 반야월, 손목인, 손로원, 현인, 신세영, 금사향, 심연옥 등 숱한 가요인들이 오리엔트 레코드사에 의지해 전쟁 속에서도 음악 활동을 했다. 이병주의 각별한 노력으로 레코드사 2층 다방에 군용 담요를 둘러쳐 방음을 하고 야간에 녹음을 했다. 그렇게 취입한 노래 중 30여 곡이 히트를 했다. 대부분이 전쟁의 아픔과 전란의 상처를 달래준 가요들이다.
전쟁가요는 대중가요의 주류인 트로트와 결합하면서 노랫말의 서정성과 멜로디의 대중성이 시대의 비극성에 절절하게 부응한 노래들이다.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전쟁가요를 '처절한 아픔 한편에 살아 숨 쉬는 휴머니티'라고 했다. 전란 속의 음악은 처연(悽然)하고 애절한 정서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인간애와 가족애의 애틋한 표현으로 평화를 희구하는 절규(絶叫)이기도 했다.
계산성당에 있던 육군 정훈감실의 군가 심사에서는 탈락했지만 진중(陣中)가요로 널리 퍼져나간 '전우야 잘 자라', 전선과 병영(兵營)에서 군가보다 더 많이 불렀던 '전선야곡', 부산 국제시장과 대구 양키시장 '장사치'였던 흥남 철수의 실제 인물 '금순이'의 사연을 강사랑과 박시춘이 노래로 엮은 '굳세어라 금순아', 전장에 나간 남편의 무운(武運)과 안전을 비는 '임계신 전선'과 '아내의 노래'가 그렇게 나왔다.
6·25전쟁 최후의 보루였던 대구는 전쟁가요의 메카였다. 대중가요만큼 파란 많은 역사의 현장을 곡진(曲盡)하게 반영하며 피폐한 현실을 위로하는 문화예술 장르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음악의 도시를 자부하는 대구에 가요박물관 하나 없다. 지난 25일 향촌문화관 지하 '녹향'에서 '오리엔트 레코드사가 지닌 가요사·인문학적 가치'를 역설한 이동순 전 영남대 교수(가요평론가)의 탄식에 공감하는 이유이다.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joen04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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