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년, 브뤼셀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페르센 백작은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으며, 단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내 모든 것을 바쳤고, 가슴 깊이 사랑하였으며, 수천 번이라도 내 목숨과 바꿀 수 있었던 여인이 이제는 없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누이여, 지금의 나는 그저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은 심정일 뿐이다. 오로지 그녀를 위하여…'이 절절한 스웨덴 남자의 사랑을 알게 된 건 1970년대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해적판에서 였다.
이 창에 서린 성에처럼 서늘하고도 슬픈 사랑은 바이킹과 노벨상, 그레타 가르보, 잉그리드 버그만, 잉마르 베르만 감독의 영화 그리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말괄량이 삐삐', 멤버들 이름 첫 글자를 딴 그룹 아바(ABBA)의 'I have a dream'과 함께 스칸디나비아 3국(그들은 이 명칭을 싫어한다.) 중 스웨덴으로 내겐 각인된다. 아, 1926년 일제가 주도한 경주 서봉총 발굴에 참여한 구스타프 황태자가 또 스웨덴 현 국왕(구스타프 6세)의 조부다.
◆감라스탄, 피와 영광의 역사
올해 봄 쌀쌀한 어느 이른 아침, 스톡홀름의 구시가지 감라스탄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그야말로 '챙' 소리가 나듯 차고 푸르렀다. 유럽의 하늘이 우리와 위도는 비슷하면서 지중해성 기후 특성인지 늘 흰 구름덩이가 추상명사처럼 떠다닌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또 나라마다 미세하게 색깔이 달랐다.
런던은 흡사 웨지우드 도자기처럼 우유를 살짝 섞은 듯 부드럽게 파랗고, 파리는 브르봉왕가 문양 바탕처럼 조금 더 짙푸르다. 독일은 왠지 흐린 날의 기억밖엔 없고 스페인은 좀 무겁게 파랗다. 그 기억들이 무의식적으로 유럽 여행때마다 푸른빛 도는 옷을 챙기게 한 듯한데.
증개축이 법으로 금지된 감라스탄은 16세기 중세로 워프한 듯 돌이 깔려 걸을 때마다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난다. 일행들과 한 줄로 늘어서 '가장 좁은 골목' 계단을 오르고 나지막한 고서점을 지나 낡고 바랜 보석이 진열된 상점과 여러 카페를 지나도록 행인도 없이 거리는 텅 비어 있다. 우리는 너무 일찍(그것도 휴일 아침에) 여행지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이 아름다운 도시는 아침 찬바람처럼 쌀쌀맞았다.
교회 모퉁이 15㎝높이로 스웨덴에서 가장 작은 공공기념물 '달을 보는 어린소년(Pojke som tittar på månen)'은 굶어 죽은 고아 소년을 기리기 위한 청동상이다. 스웨덴 복지의 상징이라는 이 청동상 기단에 누군가 두고 간 백동전이 가득하다. 찬바람에 눈이 쏠려 고개를 돌리자 거리 곳곳에 창을 든 기마상과 투레질하는 청동 말들이 서 있다. 아, 이곳이구나. 스웨덴 대학살이 일어났다는 스토르토리에트광장이.
여기가 1520년 부당한 칼마르동맹을 파기하기 위해 스웨덴 섭정 스투레가 일으킨 반란이 덴마크왕 크리스티안2세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의 화의에 속은 스웨덴 귀족 80여 명이 영문도 모르게 이곳에 모였다가 무참히 살육당한 곳이라고. 이후 구스타프 바사가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1523년 6월 6일 스웨덴을 탈환해 독립을 쟁취하고 바사왕조를 세워 그들이 살육당해 던져진 우물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고.
우울이 급하게 밀려온다. 어느 나라의 역사엔들 피가 흐르지 않으랴만, 우물에 세워진 기념비는 어찌나 그 색상이 칙칙하던지. 비가 내리면 번화한 이 광장에 깔린 돌들이 피처럼 붉은 빛으로 변한다니 더욱 착잡하다. 더군다나 기념비 바로 정면이 노벨상 박물관(Nobelmuseet)이다. 금빛 찬란한 노벨의 흉상이 닫힌 유리문에 크고 둥글게 각인되어 있다. 바로크와 로코코 건물 사이 피의 역사와 영광의 역사가 한자리에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스톡홀름 시청사, 노벨상 그리고 소설가 한강
스웨덴 한림원(학술원)은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를 겸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 선정기관은 분야마다 다른데 물리·화학, 경제학상은 스웨덴왕립학술원이, 의학·생물학상은 카롤링스카연구소가, 평화상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각각 결정한다. 이 관행은 1901년 첫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했던 시절부터 100년 이상 변치 않고 있는 전통이라 한다.
올해 감동스럽게도 한강 소설가 덕분에 우리나라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보유국이 되었지만, 올 봄의 나는 꼭 그곳 스웨덴 한림원엘 가보고 싶었다. 종종 여행 중 일정에서 혼자 빠져 나와 다른 곳을 둘러보고 일행에 합류했던지라 미리 그 위치와 차편까지 알아두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오후의 크루즈 탑승 보딩에 불안해하는 가이드 선생의 표정을 보곤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아쉽다. 노벨상 박물관과 한림원을 둘러보는 과감한 결정을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쉽다.
스톡홀름은 스웨덴의 수도로 그 이름이 통나무(Stock)와 작은 섬(Holm)에서 유래되었다. 현재 13개의 하중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지역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통나무를 띄워 도시를 만들면서 이름을 붙였다는 설도 있다. 노벨상 기념 만찬이 열리는 스톡홀름 시청사 정면엔 역시 물의 도시답게 멜라렌호가 펼쳐져 있다.
1911년 건축가 라그나르 외스트베리가 설계해 푸른 벽돌로 지으려했던 당초 계획과 달리 붉은 벽돌과 꼭대기에 세 개의 왕관이 장식된 106m 탑이 설치된 스칸디나비아와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된 웅장한 건물이다.
시청사에 들어서면 1층엔 배구장 10개 규모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 '블루 홀(노벨상 기념 만찬이 열리는 곳)'이 있다. 2층엔 시의회 공간인 '레드 홀'과 1톤 무게의 동으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스웨덴 역사를 소재로 한 대형 모자이크와 금박 장식을 한 스톡홀름의 여왕으로도 불리는 메라렌 여신 벽화가 설치된 '골든 홀(노벨상 기념 무도회가 열리는 곳)'이 있다.
알프레드 노벨은 이렇게 유언했다. '(유산에서 발생하는) 이자는 다섯 등분하여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화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이나 개발을 한 사람, 생리학 또는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문학 분야에서 이상주의적인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국가 간의 우호와 군대의 폐지 또는 삭감과 평화 회의의 개최 혹은 추진을 위해 가장 헌신한 사람에게 준다.'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오는 12월 10일 열리는 노벨상 시상식은 시청에서 1.5㎞ 떨어진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홀에는 '노벨상(The Nobel Prize)'이 새겨진 파란색 카펫이 깔리고 스웨덴 왕 구스타프 6세가 수상자에게 직접 노벨 메달을 전달한다. 한강 소설가는 우리나라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 동양여성으로서 최초, 백인 이외 유색인 여성으로선 두 번째(토니 모리슨이 첫 번째 수상자다) 그리고 121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당당히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큰 기쁨이다.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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