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작은 돌과 나무 막대였다. 그것이 때로는 천 번을 굴러, 때로는 캔버스에 천 번 내려쳐지며 역동적이고 강렬한 작품을 그려냈다. 화려한 기교나 생각의 여지를 남기는 형태는 없지만, 그 '없음'에서 느껴지는 응축된 힘과 웅장함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최상철(78) 작가는 196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서울특별시장상을 수상하며 화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5~78년 대구현대미술제에 참여했던 그가 50년 만에 다시 대구를 찾았다. 우손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최상철 개인전 '무물(無物)'은 작가가 그간 쌓아온 작업세계의 궤적을 대구에서 처음 선보이는 전시로, 1970년대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볼 수 있다.
전시 제목 '무물'은 작가가 2004년 이후 작업해오고 있는 작품 제목이다. 전시를 기획한 박겸숙 큐레이터는 "무(無)는 '단순히 없음'이 아닌, 어떤 것으로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있는 혼돈 그 자체다. 그것은 온갖 사물들의 시작이며 근원"이라며 "다시 말해 무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충만한 순간을 칭하는 말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그 순간, 그 자유로움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 최초의 순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잘 그리고자 하는 욕망과 감정, 의도 등 모든 것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왔다.
그래서 일부러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운 도구를 찾고, 천 번을 반복적으로 행한다는 규칙을 정했다. 그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묻히고 그 위에 돌이나 실, 철사를 올려 천 번을 굴리거나 대나무 막대를 캔버스에 세게 내리치는 등 오로지 행위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색도 배제했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한 검은 흔적만이 캔버스에 남았다. 인간의 의도가 제거된 자유로운 궤적들에는 마치 태초의 자연 그대로가 가진 질서들이 담긴 듯하다.
작가는 "최고의 그림은 인간이 그려낸 최초의 그림일 것"이라며 "아무 생각 없이 장난삼아 한 그 흔적이 사실은 가장 솔직하고 인간적이다. 그림이 그래야지만 생명력이 다시 회복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큐레이터는 "작가가 마주하고자 했던 것은 회화의 시원(始原)이다. 그는 완숙된 기교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의 도구에 익숙해지는 것을 경계했다"며 "작가는 그래야만 꾸미지 않는 진정한 세계인 자연, 다시 말해 '있음 그 자체'가 자신의 캔버스 위에 온전히 내려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그것과 마주하기 위해 한 걸음씩 다가간 모든 순간을 이번 전시를 통해 경험하길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11월 16일까지. 053-427-7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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