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독립운동가이자 사군자화가인 긍석 김진만의 '괴석도'다. 이 작품은 매난국죽을 중심으로 괴석, 계수나무, 모란, 파초, 포도, 오동나무 등을 더한 군자화목도(君子花木圖) 10폭 병풍의 제2폭이다. 괴석은 김진만이 좋아한 소재였다. 선생이 작고한 4년 후 매일신보(1937년 4월 15일자)에 실렸던 그림도 괴석도다.
제화시는 조선 중기의 천재 시인 최립이 약관의 나이에 장원급제했을 때 즉석에서 지어 올린 칠언율시 40수 중 궁중의 괴석을 읊은 '괴석' 뒷부분이다.
태흔유처욕연기(苔痕幽處欲煙起)/ 이끼 흔적 그윽한 곳에선 안개가 일어날 듯
수맥상시성우첨(水脉上時成雨沾)/ 물이 타고 올라올 땐 비에 흠뻑 적셔질 듯
야위청관선안독(也爲清官仙案牘)/ 청렴한 관원께서 문서를 보시는 책상으로
장교상기투소렴(長教爽氣透疎簾)/ 성긴 발 뚫고 상쾌한 기운 들어오게 하리라
긍석(肯石)
일제강점기 서화가로 8년 4개월의 실형을 산 독립운동가는 김진만이 유일할 것이다. 독립군 군자금 마련을 위해 동생과 함께 벌인 '대구권총사건' 주모자였다. 김진만 선생이 사군자를 한 것은 대구형무소에서 출소한 후 타계하기까지 10여 년간이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로 인해 사회 활동이 어려웠다는 점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김진만의 동생과 김진만의 세 아들이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가 집안이기 때문이다.
전하는 김진만의 사군자는 주로 병풍화다. 원래 병풍화를 많이 그렸을 것 같고, 독립운동가의 작품이라 존중되었던 점, 덩치가 커서 쉽게 망실되지 않은 점, 크고 작은 행사에서 병풍이 의례용으로 요긴했다는 점 등이 많이 보존된 이유일 것이다.
한학을 익힌 전통 지식인인 김진만이 대작인 병풍화로 작품 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작가적 역량과 작가로서의 기반이라는 두 가지를 함께 말해 준다. 병풍화는 8~12폭을 채울 수 있는 다양한 소재를 소화해야하며, 전체를 펼쳤을 때 각각의 폭이 유기적으로 어울려야한다. 또 사군자류는 어울리는 제화가 있어야하고 낙관도 중요한 요소이므로 이에 대한 안목이 필수적이다.
이런 기량을 갖췄더라도 수요가 없다면 많은 작품을 남기기 어렵다. 김진만의 병풍화는 대구, 대구와 가까운 지역뿐 아니라 안동, 봉화, 예천, 영양, 경주, 포항 등 경상도 곳곳에 전한다. '괴석도'가 들어있는 10폭 병풍은 봉화 금씨 매헌종택 소장품으로 지금은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돼있다. 퇴계 선생의 묘갈명 글씨를 쓴 매헌(梅軒) 금보(琴輔)의 후손인 명문가다. 경상도의 행세하는 양반가문에서는 독립지사의 기개와 정신을 상기시키는 문화적 위세품인 김진만의 사군자병풍을 사랑에 펼쳐 놓았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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