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년기에 보드게임 '부루마불'을 즐겨 그 잔상이 짙은 걸까. 유독 수도(首都)가 헷갈리는 나라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그렇다. '호주'라는 말을 들으면 '시드니'라는 세 글자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전경이 떠오른다. 분명히 시드니가 오스트레일리아 수도가 아님을 안다. 하지만 '캔버라'라는 세 음절은 누가 먼저 말해 주기 전에는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캐나다도 비슷하다. 몬트리올이나 토론토, 밴쿠버 등이 먼저 나오지 오타와는 입에 익숙지 않다. 튀르키예는 이스탄불이 아니라 앙카라가 수도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부루마불에 등장한 도시는 대부분 각 국가를 상징하는 최대 도시였다. 어린 내게는 게임 안팎으로 대한민국에서 수도 '서울'의 위상이 강렬해 다른 곳도 수도로 여겨졌을 뿐. 외국인에게 대한민국을 물었을 때 천년고도 경주, 해양도시 부산 등을 가장 먼저 떠올릴 이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한국은 정치, 경제, 문화, 의료, 교육 등 모든 국가 기능과 자원이 한곳에 집중된 '서울공화국'이다.
31일 인천국제공항이 4단계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제 4개 활주로에서 60만 회 운항으로 1억 명이 넘는 승객과 630만t(톤)의 화물을 처리하는 명실상부 '글로벌 빅3 공항'의 위용을 뽐낼 시간만 남았다. 1883년 제국주의 세력의 강압에 제물포(인천의 옛 이름)를 치욕적으로 개항한 역사를 떠올리면 분명 가슴이 웅장해지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만사 명암은 공존하는 법. 인천공항의 '무한 팽창'에서 '수도권 일극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본다.
이게 기우에 그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인천공항은 시험 운전 등으로 4단계 '그랜드 오픈'까지 한 달여가 남았지만, 인천공항공사의 눈은 벌써 5단계 확장 사업에 가 있다. 약 6조원을 들여 연간 2천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제3여객터미널과 3천400m 길이 제5활주로를 만들 생각이다. 국토교통부는 "어떤 결론이 있는 것은 아니고 검토 중"이라지만, 공사(公社) 내부적으로는 내년에 공사(工事)를 시작해 2033년 완료를 목표로 잡고 있다.
22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도읍 국민의힘 의원은 "5단계 건설사업은 가덕도신공항, 대구경북신공항과 연계성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며 "균형발전과 국제선 수요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당 권영진 의원(대구 달서구병)도 "지방 공항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임명한 이학재 인천공항공사 사장은 두 공항이 개항해도 여객분담률이 1~2%밖에 되지 않을 것, 인천공항이 포화하면 여객이 일본 하네다 등 외국 공항을 이용할 우려가 있어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신앙심'까지 동원하며 귀를 닫는다.
현실이 이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은 균형발전의 날이던 29일 "우리 정부는 지방시대 정부"라고 했다. 듣기에는 좋지만, 도무지 실천이 따르지 않으니 공허하다. 공공기관 2차 지방 이전은 문재인 정부에 이어 '희망 고문'의 연속이다. 부동산 정책은 서울 집값을 핑계로 수도권 집중을 부추길 서울 그린벨트 해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제는 하늘길에서도 벌어지는 수도권 집중에 따른 불편을 비수도권 국민은 감수하라고 강요당하는 상황이 빚어질 판이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쓴 스티븐 코비 박사는 "알면서 행하지 않으면 정말로 아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이쯤이면 "균형발전은 정치적 수사였다"고 자백(自白)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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