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해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제(祭)를 올렸다. 제가 끝나면 마을굿이라고 하는 판굿을 벌이는데 여기서 '풍물놀이'가 시작됐다.
굿의 기본 악기인 꽹과리, 장구, 북, 징 등 네 개 풍물은 자연 소리를 대신한다. 꽹과리는 천둥번개, 장구는 비, 북은 구름, 징은 바람이다. 자연의 소리를 내는 악기로 신과 소통하는 것이다. 풍물을 기본 구성으로 지역마다 소리를 내는 방식이나 구성은 모두 다르다.
대구 서구 비산동에도 40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 농악이 있다. 바로 '천왕메기'다. 대구시는 1989년 천왕메기를 무형유산 예능 종목으로 지정하고 제4호 천왕메기 예능보유자로 김수기(81) 씨를 선정했다.
김 씨는 단원 40여 명을 이끌면서 전통 농악을 계승하고 원형을 보존해 오고 있다. 그는 대구 최초 사물놀이패인 '달구벌 사물놀이패'를 만들어 후대 국악인을 다수 배출하기도 했다.
대구시가 지정한 무형유산의 전통성과 예술성, 우수성을 대중에 알리기 위해 매년 열리는 '2024 대구무형유산제전'을 약 일주일 앞둔 지난달 7일 대구 서구 문화회관에서 김 씨를 만났다.

-천왕메기란 것이 낯설다. 소개를 해주신다면.
▶천왕메기는 1989년 6월 15일 대구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예능 종목이다. 대구 서구 비산동의 마을 수호신인 천왕님에게 동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매년 제를 올렸다. 천왕메기는 천왕님께 제를 올리고 나서 하는 농악단이 하는 살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400여 년 동안 내려오는 비산동의 전통적인 농악이다.
-언제부터 풍물을 하게 된 건가.
▶14살 때 마을에 풍물 악기 보관하는 곳에서 악기를 빼 들어 치고 다닌 게 꽹과리 인생의 시작이다. 원래는 경남 밀양 출신이다. 그때는 풍물 악기를 다루는 동네 어르신들이 많았다. 특히 꽹과리 소리가 많이 났다. 그 소리를 자주 듣다 보니 어린 나이에 '나도 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전통 가락을 전문적으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대도시인 대구에 27살쯤 이사를 왔다.
-대구에서 비산농악을 만나게 된 계기는.
▶풍물을 업으로 삼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대구 살이를 시작한 즈음인 1970년부터는 떡 장사를 시작했다. 어느 날 장사를 하고 있는데 농악단이 시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물어보니 대구 비산동의 전통적인 농악단인 비산 농악단이라고 하더라. 곧바로 악단의 수장인 상쇠를 찾아가 악단에 들어가서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농악단 연령대는 평균 60세 이상으로 노인밖에 없었다. 젊은 사람이 농악대에서 한 악기를 꿰차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악단의 멤버로 활동하지는 못하고 그때 상쇠(농악단의 수장)셨던 임문구 선생에게 개인적으로 꽹과리 가락을 전수 받았다.
-비산 농악단에 정식 단원으로는 어떻게 들어갔나.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라는 것이 있다. 대구가 1982년도에 경북 대구시에서 대구직할시로 바뀐 다음 해인 1983년에 그 전국 대회에 나갈 농악단 팀을 따로 선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15명밖에 없었는데 40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했다. 그때 운이 좋게 비산 농악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농악단에 들어간 지 3년 만에는 비산 농악단의 제3대 상쇠를 맡았다. 1986년 상쇠였던 스승 임문구 선생이 암 투병을 하면서 상쇠를 나에게 물려주면서다.

-1989년에는 대구시 무형유산 제4호 지정을 받았다.
▶무형유산으로 지정될 때가 될 때가 49세였다. 대구시에서 무형유산으로 지정할 때도 나이가 어려 고심이 깊었다고 알고 있다. 심사하는 분 중 몇 분이 나이를 따질 것이 아니라 문화유산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지정을 하는 것이 가치가 높다는 의견을 강력히 피력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400여 년 동안 내려오는 대구 서구의 천왕메기를 이을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덕분에 당시 상쇠로서는 최연소로 무형유산 보유자가 됐다.
-지역 최초 사물놀이패인 '달구벌 사물놀이패'도 만들었다고 들었다.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후에 천왕메기 계승의 책임감이 막중했다. 후대를 양성해서 천왕메기라는 것을 이어가야 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풍물놀이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문화유산으로 계승을 하려면 일단 사람이 많아야 하지 않나. 농악 단원 확보를 해야 했다. 기존의 단원들도 15명밖에 안 됐는데 농악단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현실이 너무 열악하기도 했다.
젊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려면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87년 대구 최초로 사물놀이패를 만들었다. 사물놀이는 기존 농악을 현대화해서 대중 친화적인 형태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거다. 풍물보다 악기 수가 조금 더 적고 실외가 아닌 실내에서 한다. 이런 요소가 젊은이들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물놀이패를 운영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
▶실내에서 하는 것이다 보니 꾸준히 연습하고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떡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사비를 들여 작은 공간을 하나 샀다. 늘 그렇지만 풍물 악기를 다루는 것만으로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무리인 부분도 있었다. 상황이 어려운 단원들의 숙식도 해결해 줬다.
현실이 열악했음에도 전국대회에 4년 연속으로 대구 대표 농악단으로 나갔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사물놀이패를 만든 지 1년밖에 안 된 1988년도에 농악부문 장관상을 받았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상에 버금가는 큰 상이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국악인을 키워내고 배출해 왔다.
▶문화유산이라는 것은 전통 그대로 전해져야 한다. 변하는 시대에 맞게, 대중화를 위해 변형을 하는 일이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문화유산 고유의 형태는 그것대로 보존해야 하는 것이 맞다. 국가가 나서서 문화 무형유산을 지정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이 전통성이 무시 당하는 순간들을 목도했다. 변형을 해놓고, 그것이 전통이라고 우기는 예능인이 많다. 예컨대 천왕메기 안에 속한 것이 날뫼북춤인데 날뫼북춤 예능 보유자를 따로 인정하게 된 이후로 조금씩 변형이 이뤄지고 있다.
국가에서 원형을 기록해두지 않으니 예능보유자가 변형을 해도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 상황이 생기고 있다. 농악단이 북을 치고 장구를 치는 순서 등은 연극의 짜여진 대사처럼 정해져 있는 것이다. 국가에서 이를 확실히 해서 전통성이 유지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악인으로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전통 농악을 계승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살아왔다. 아쉬운 점은 무형유산으로 지정을 해놓고 끝이라는 거다. 지정을 해놓은 관계 관청에서 지원이 열악하다. 풍물별로 전승 교육사도 필요하다. 부산은 풍물별로 북 보유자, 꽹과리 보유자 등 별도 지정을 하는 식으로 후대 계승에 힘쓴다. 관리를 해서 대구시가 지정한 무형유산이 잘 보존되고 전승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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