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11월의 미각

커피와 낙엽 그 사이… '가을의 맛'이 있더라

가창 정대의 한 숲에서 만난 지난 시절의 만추낙엽.
가창 정대의 한 숲에서 만난 지난 시절의 만추낙엽.

지난 여름에 올해 첫 낙엽을 봤다. 불시착한 '운석' 같았다. 아니 '경전' 같았다. 다시 그리고 11월, 진짜 가을이 진군해 왔다. 고산골의 한 식당에서 '아점'을 해결하고 근처 나만의 명상벤치에 앉았다. 잘 갈아놓은 조선낫 같은 벽공(碧空). 하늘은 말간 원형 그대로이다.

가창에서 본 느티나무 낙엽의 전율.
가창에서 본 느티나무 낙엽의 전율.

◆미학의 말로

완벽한 아름다움! 그 자체가 '고문'이다. 말과 글로 그 깊이와 막막함을 피력할 수 있을까. 단연코 없다. 강신무 같은 눈초리를 가진 시인이라면 그 심도를 흡수할 수 있을까. 만추지절(晩秋之節)이다. 가을의 맛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누군 '청승살'로부터 가을이 온다고 했다. 아무튼, 커피와 낙엽 사이에 거미줄 형용으로 걸려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커피는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낙엽은 반대로 남쪽에서 떠올라 북쪽으로 진다. 그래서 커피 한 잔은 어떤 물성이 아니라 차라리 '한 잔의 철학'이라 명명하는 게 더 낫다. 왜관역 바로 옆에 있는 빈티지카페 '하루역'에는 세기말의 권태, 그리고 추풍령 발치 김대호 시인이 꾸려가는 카페 '시남(詩男)'에는 사철 푸릇한 객수감(客愁感)이 고여 있다.

앞산 고산골에서 만난 단풍잎.
앞산 고산골에서 만난 단풍잎.

◆11월 & 2월

11월에는 서점이 빵집과 겹쳐져 보인다. 이젠 빵 옆에 반드시 커피가 따라붙는다. 그래서 '베이커리카페 신드롬'의 시절이다. 11월은 애매한 계절. 가을도 겨울도 아닌. 그래서 소설보다는 '시'(詩)에 가깝다. 갑자기 대명9동 시 전문 독립책방 '산 아래 시'가 떠오른다. 한밤중, 그 가게 앞을 지나가면 그 책방이 '등대'처럼 서있다.

오후 5시를 넘어서면 서녘 하늘이 가을가을거린다. '가을가을거린다'는 나만의 표현. '땅거미'와 상응한달까.

요즘처럼 중년 남성의 일상이 비참한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것 같은. 그래서 그들은 중독을 갈구한다. 술을 최고의 도반으로 품은 자들이다.

언젠가 공광규 시인의 '소주병'이란 시를 읽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문밖에서/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나가보니/마루 끝에 쪼그려앉은/빈 소주병이었다.'

'이 시대의 고개 숙인 중년 남성들을 위한 최고의 위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술한테도 사랑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그럴 리는 없다. 간암을 염려하지만 사실 찌그러진 맘은 간암보다 더 망가져 있다. 더 망가질 것도 없는 삶이기에 술은 누구에게 '최대의 위안'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단풍잎을 만지며 커피를 마신다. 향기의 온기는 비행운(飛行雲)처럼 점점 사라진다. 문화는 '연골'이다. 권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일상이란 뼈를 문화가 안 다치게 감싸 안아준다.

습기가 많이 사라진 내 손바닥을 펴 본다. 잠자리 날개의 피륙이 감지된다. 서둘러 이운 옥수수 이파리도 그 위에 겹쳐진다.

나는 지난 30년 간 팔도의 이런저런 골목의 먹성이 그려내는 미각의 최전선에 있었다.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났었다. 이런저런 만남이 이런저런 즐거움을 주지만 그 즐거움은 딱 거기까지. 즐거움이 지나면 다들 집으로 간다. 오, 잠옷은 혁명보다 더 냉정하다. 성공한 혁명은 고독한테 잡아먹히게 된다. 혁명보다 고독이 더 힘이 센 탓이다.

단양에서 만났었던 코스모스. 흑백톤으로 톤타운 시킨 이미지.
단양에서 만났었던 코스모스. 흑백톤으로 톤타운 시킨 이미지.

◆음식과 음식 사이

음식과 음식 사이에 삶이 있다. 음식도 '간이역'인 셈. 혼자 먹는 밥은 없었다. 하지만 '혼자만의 식탁'이 폭증하고 있다. 편의점에서의 혼밥, 그리고 혼술. 시선은 항상 폰의 화면에 꽂혀 있다. 모두 폰에 가스라이팅된 것 같다. 폰의 주인은 실은 내가 아니고 '광고'이다. 광고로 폰을 팔고 그 폰을 통해 광고를 해야 광고주도 먹고산다. 광고로 흥하고 광고로 망한다. 자본주의는 '광생광사'(廣生廣死)의 도박판이다. 출가는 속세를 떠나는 게 아니다. 지금 출가는 폰과 이별하는 것.

나라는 풍년인데 소시민의 일상은 흉년 일색이다. 교차로에 까마귀 떼처럼 몰려있는 젊은 배달족의 복장은 약속한 것처럼 검정톤이다. 자기 현재 맘을 표출한 걸까.

인간관계가 전멸하면 바람이 비로소 눈높이로 보인다. 바람은 무척추지만 척추를 가진 자를 엄호사격해준다. 바람은 그래서 좌표가 없는 UFO. 모든 걸 잃으면 사람은 다 떠나지만 바람만은 무너진 자를 부축한다. 그렇다고 바람이 삶의 동반자는 아니다. 그냥 생명의 흔적일뿐.

곁에 있던 일이 모두 사라진다. 그럼 나를 종일 데리고 놀아야 한다. 그러면 매 순간 내가 나한테 밀린다. 내가 시시때때로 나타나 투정하고 날 무시한다. 가슴이 실금처럼 파리해진다. 찾아오는 건 세금과 요금, 그리고 벌금과 병밖에 없다. 사방이 적막하다. 적적하고 무료하고 심심하다. 예전 어르신들은 그걸 인문학적으로 관망할 도리가 없기에 즉시 '말벗'을 찾아간다. 말벗이 구원이고 진정제였다. 인적이 끊어진 대낮의 그 섬뜩한 막막함을 서로 부축해가며 경로당에서 소일했다. 말벗도 죽고 없으면 '사면초가'다. 종일 목석같이 멍한 자기밖에 갖고 놀게 없다. 대책 없이 대문 앞 의자에 앉아 오가는 행인을 죽어라 하고 바라본다. 해가 지면 다시 구석방으로 들어가 TV만 보다가 잠이 든다. 이게 삶일까. 누군 그걸 '사회적 사망'이라 한다. 그러다가 근육이 다 녹아내려 이부자리만 보전하면 '생리적 사망'에 든 것이다.

달서구 대천동 대명유수지에서 본 억새군락.
달서구 대천동 대명유수지에서 본 억새군락.

◆부모라는 전생

집에서 성장한 자식이 어느 날 집을 떠나 사회란 전장으로 떠난다. 거기서 잘 싸워야 평화로운 말년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자기 집으로, 자기 가족 곁으로 가지 못하는 자도 숱하게 많다. 중환자, 노숙자, 도피자, 외톨이, 수감자, 자연인…. 그들에겐 하나 공통점이 있다. 언어가 너무 충혈돼있다는 것. 거의 '초월적'이다.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생은 부모이고 저승은 자식'이란 것. 그 생각 때문에 나는 차분하게 일상에 젖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생각. '죽음'이 존재하기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유는 이렇다. 내 몸이 개체적으로 죽어도 내가 내 자식이란 방식으로, 유전자 안에 온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내 생명이란 소유권도 실은 내 것도 아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공기, 물, 음식, 옷, 그리고 나를 양육시켜준 부모, 그리고 가족의 정…. 어디 그뿐인가. 우주가 총동원돼 나 하나를 지탱시켜 주고 있다. 나는 무한 채무자이다. 갚아야 할 것, 감사해야 될 것 천지다.

다시 너무나 공활(空豁)하고 청아한 가을 하늘을 본다. 사람 말고는 모든 게 홀가분하다. 밀쳐두었던 시집을 유물처럼 품어본다. 나는 아직 경전에 익숙하지 못하다. 경전의 주인공이 만들어 놓은 종교의 지형도가 너무나 아전인수격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아직 뚜렷한 종교가 없다. 굳이 있다면 '자연교' 정도.

앞산순환도로변에서 만난 만추의 담쟁이덩굴.
앞산순환도로변에서 만난 만추의 담쟁이덩굴.

◆역사의 종언

인류를 위한다고 탄생한 종교와 국가와 자본이 서로를 적으로 몰아가고 있다. 사대성인의 내공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다. 경쟁하지 않고 저마다 타고난 소질을 갖고 무탈하게 살 수 없는 세상이 돼버렸다. 같이 쪼개 먹고 살자고 했던 공산주의도 백기투항하고 말았다. 역사학자 후쿠야마의 말처럼 인류는 자본주의로 통폐합돼 버렸고, 그래서 '역사는 종언'해 버린 건지도 모른다.

모두 성공과 출세의 승리자가 되고 싶어한다. 이 나라 부모는 좋고 안정되고 평생이 보장되는 직장만 연호한다.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일수록 직장에서 은퇴하면 '사색'(死色)이 된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모든 지구인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세상이 유토피아로 변할까. 다만 저마다 자기 창법으로 다소간 덧없는 '지구별 놀이'를 완수하고 사라지겠지.

◆만족이란 위안

몸이 지면 맘도 덩달아 져버리는데 맘이 버텨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만족'(滿足)이란 허무주의자의 '핑계'일 수도 있고 항복하는 자의 '부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족은 자유만큼이나 무서운 존재다. 너무 없어 만족할 수밖에 없는 자의 만족은 너무나 피동적이라서 기운을 상실하기 십상이다. 합리화된 만족인 탓일까.

만족이란 엄청난 의지의 반영이고 아주 지적인 영감이 작동되어야 한다. 가져 보았고 그리고 잃어도 보았던 사람은 그래도 만족할 수 있는 필요조건을 안다. 하지만 평생을 궁핍과 빈곤 사이를 오간 이들에게는 만족이 되레 덫이 될 수 있다. 그들에게는 만족보다 기회를 위한 재충전이 더 절실할 것이다. 만족이란 말을 너무 쉽게 건네지 말자. 대신 불만족 상태를 관조해보자.

2024년의 가을 벽두. 문득 지난 1일이 '시의 날'임을 상기시키고 싶어 긴 푸념을 늘어놓았다. 어쩜 최고의 싸움이 또한 평화이며 행복임을 상기해보며 이번 주에는 잠시 음식이야기를 건너 뛰어보았다. jeb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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