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저 먼 길을 이동하다니, 정말 대단하다!"
어김없이 대구 동구 신기동 안심공원을 찾은 박시원(가명·92) 씨. 친구의 감탄 섞인 한마디에 멋쩍게 웃고는, 늘 가던 나무 아래 벤치 옆으로 1인승 전동스쿠터를 몰았다.
박 씨는 동구의 작은 산골인 매여마을에서 혼자 산다. 이곳에 들어오는 버스는 동구5번 하나뿐으로, 배차간격은 1시간 15분. 마을 종점은 직전 정류장과 2.5㎞ 떨어질 정도로 외딴곳이다. 이마저도 몸이 불편한 박 씨에겐 무의미하다.
지난 8일과 지난달 18일 두 차례에 걸쳐 매일신문 기획탐사팀은 박 씨의 나들이에 동행했다. 시속 5~10㎞ 남짓한 전동스쿠터에 의지한 왕복 2~3시간의 험난한 외출이었다. 박 씨의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보통 오전 7시 45분쯤 집을 나선다.
박 씨는 "아픈 다리 때문에 버스는 아예 타지 못하고,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따로 사는 아들이 시간을 내 도와준다"며 "그마저도 안 되면 택시를 타는데, 손을 흔들면 10대 중 1~2대꼴로 겨우 잡힌다. 내가 목발을 짚고 있어 꺼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팡이 두 개를 양손에 쥔 박 씨는 마당 한쪽 전동스쿠터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불편한 다리 탓에 집을 나서는 데만 5분이나 걸렸다.
박 씨의 전동스쿠터는 이내 차도를 달렸다. 도로 가장자리의 박 씨 옆을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차량 통행량이 많은 반야월시장 사거리에선 자동차들과 섞여 신호를 기다렸다. 박 씨의 느린 속도를 참지 못해 경적을 울리며 앞지르는 차들도 있었다.
그렇게 5.5㎞ 거리를 1시간 정도 달려 오전 9시쯤 안심공원에 도착했다. 박 씨는 벤치 옆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혼자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누구와 대화하지 않아도, 홀로 집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 상관이 없었다.
10시 30분이 되면 이른 점심을 먹으러 근처 식당으로 향한다. 목발을 짚고 자리를 잡은 뒤 국수로 시장기를 달랬다. 남은 국물과 약을 함께 삼킨 그는 다시 공원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낸다.
보통은 오후 3시까지 공원에 머물지만, 지난달 18일엔 그럴 수 없었다. 비 예보가 있어서다. 박 씨는 평소보다 1시간 일찍 공원을 떠났다.
시장을 빠져나와 율하천에 가까워질수록 빗줄기는 굵어졌다. 하천 산책로 달릴 때쯤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전동스쿠터를 덮은 비닐이 비바람에 사정없이 날렸고, 뚫린 양옆으로 비가 들이쳐 바지가 다 젖었다.
빗속 경사진 도로를 지나온 박 씨. 얼굴을 찡그릴 법도 한데 그의 표정은 일상다반사인 듯 덤덤했다. 비를 뚫고 1시간 만에 간신히 집에 도착, 힘겹게 양쪽 신발을 벗었다. 텅 빈 방 안의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박시원 씨는 "차가 쌩쌩 지나는 길을 전동스쿠터로 다니니 자식들도 걱정이 많다. 원래 천천히 속도를 내 왕복 4시간은 걸리는데, 날씨가 좋지 않을 땐 서두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획탐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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