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존가'는 철학에 소설의 옷을 입혀놓은 것처럼 파고들면 여러 가지 철학적 담론에 직면한다. 제목에서부터 '존재'라는 범상치 않은 단어가 무게를 잡고 있는가 하면 7개의 장(chapter) 제목도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개념어로 점철되어 있다. 가벼움, 무거움, 육체, 영혼, 말(Words) 등이 그러하다. 읽기 어려운 책이라는 말이 나올만하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만 백만 부 넘게 팔려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있는 소설이다. 생각만큼 어렵지 않거나 한국 독자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방증이다. 책 곳곳에 철학적 단상이 삽입돼 있지만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담론이 장황하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맛을 내는 양념 정도이고 소설의 본류는 역시 개별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서사다.
주인공 토마시는 프라하의 잘 나가는 외과 의사다. 일찍이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지만 2년 만에 헤어지고 혼자 산다. 이혼에 대해 아쉬움도 미련도 없다. 저당 잡혔던 자유를 되찾아 유쾌할 뿐이다. 천성이 바람둥이인 토마시는 수많은 여자와 관계한다. 관계의 주축은 섹스다. 이것을 토마시는 '성적 우정(erotic friendship)'이라고 한다. 사랑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관계다. 섹스와 사랑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공동의 수면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구별의 기준이다. 토마시는 수많은 여자(200명 이상)와 성관계를 하지만 잠을 같이 자지는 않는다. 집이면 여자를 내보내고, 밖이면 자신이 침대를 떠나온다. 여기에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재룡, 29)이라는 토마시의 독특한 연애론이 나온다. 정사의 대상은 얼마든지 많을 수 있으나 사랑의 대상은 한 명 이상이기 어려워진다. 뒤에 테레자가 이 한 명이 된다.
토마시의 연애론은 '참존가'의 다른 주제들과 긴밀히 연계된다. 즉, 가벼움과 무거움·육체와 영혼·일회성과 영원회귀·우연과 필연·허무와 낙관이 그것인데, 전자는 섹스와 연결되고 후자는 사랑과 연결된다. 몸과 섹스는 우연적이고 일회적인 것으로 가볍고 허무한 반면, 영혼과 사랑은 필연적이고 반복되는 것으로 무겁고 낙관적이다. 토마시는 철저히 전자를 대변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인류 문화와 학문이 추구하고 주창해 온 것이 후자 쪽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허구이고 포장이다. 이것을 예술적인 용어로 키치라고 한다. 즉, 오랫동안 훌륭한 가치로 인식되어 온 영혼·필연·무거움·영원·낙관 같은 것은 모두 실제와는 무관한 허울이고 장식품이라는 것이다.
토마시에게 함께 잠을 자는 여자가 생기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테레자란 여자로 보헤미아에 왕진갔다가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다. 술 때문이 아니라 테이블 위의 펴 놓은 책 때문에 맺어진 인연이다. 토마시는 얼마 뒤 집을 찾아온 테레자와 이혼 후 처음으로 여자와 공동의 잠을 잔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다. 테레자의 몸에 열이 너무 많이 나 관계가 끝난 뒤에도 내보낼 수가 없어서 하룻밤 묵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룻밤이 일주일이 되고 결혼까지 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첫날 아파 누워 있는 테레자를 보고 토마시는 "바구니에 담겨 물에 떠내려온 아이"처럼 거부할 수 없는 연민을 느낀다.
토마시와 테레자가 펼치는 애증의 이중주가 소설의 중심 서사를 이룬다. 두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각각 위에서 언급한 개념 쌍의 한쪽을 대변한다. 토마스는 가벼움을, 테레사는 무거움을 쫓는다. 토마스는 육체와 섹스를, 테레자는 영혼과 사랑을 추구한다. 이것은 다시 우연과 필연으로 연결되고 마지막엔 키치와 반키치로 이어진다. 갈등의 중심에는 토마스의 중단되지 않은 '성적 우정'이 있다. 그는 테레자를 사랑하는 것과 상관없이 계속 다른 여자들과 '가볍게' 성관계를 한다. 테레자에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자신도 결국 그런 가벼운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이 더욱 참을 수 없다.
누군가 토마시에게 여자는 다 그게 그거일 텐데 왜 그렇게 많은 여자(25년간 200명 이상)와 관계하느냐고 묻는다. 그는 1년에 열 명도 안 된다고 너스레를 떨며 희한한 논리를 펼친다. 사람은 모든 부분에서 서로 차이가 있는데, 100만 분의 1의 차이다. 이 미세한 차이가 자아의 고유한 유일성을 이루고 이것을 아는 것만큼 신비롭고 놀라운 체험은 없다. 이것은 체험하기 전에는 결코 예측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다. 모든 부분에서 저 차이를 발견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섹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한다. 토마시는 이 신비롭고 마법 같은 체험 때문에 '에로틱 우정'을 그만두지 못한다. 여기에 이론적 논거도 마련해 놓았다.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327)
토마시가 이 자아의 유일성을 성관계에서 가장 잘 느끼는 것은 외과 의사로서 훈련된 감각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많은 여자와 관계하는 것은 관능의 욕구가 아니라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이라고 한다. 이것은 궤변이고 결국 제어되지 않은 바람기일 뿐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도 화자는 토마시를 대변해 해명을 내놓는다.
자고로 바람기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바, 서정적인(lyrical) 바람과 서사적인(epic) 바람이 있다. 서정성은 주로 시가 대변하는데 주관적인 감정의 표현으로 시공에 따른 변화는 관심 밖이다. 서정적인 바람둥이는 파트너를 아무리 바꿔도 항상 같은 유형을 맴도는 사람을 말한다. 어디서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모르나 내면에 자신만의 이상형이 있어 여기에 맞는 대상만 찾는다. 어떤 사람이 파트너를 아무리 바꾸어도 늘 같은 타입이라면, 이것이 바로 서정적인 바람이다. 이것이 심할 경우 주변 사람들은 파트너가 바뀌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런 바람둥이는 상대를 사랑한다기보다 자신의 이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만나도 실망할 수밖에 없고 '환승'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와 정반대의 경우가 서사적 바람기다. 문학에서 서사적이라 함은 사건이나 행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서사는 새로운 인물이나 새로운 사건에 의해 추동된다. 서사적 바람은 서정적 바람과 달리 고정된 이상형이 없다. 이전 사람과 얼마나 다른가가 유일한 동기이고 기준이다. 서사적인 바람둥이는 일반화되고 정형화된 아름다움 따위는 관심 밖이다. 당연한 논리지만 쉽게 싫증을 내고 권태에 빠진다. 새로운 것은 곧 새롭지 않아지기 때문이다. 토마시가 바로 그러한 서사적 바람둥이의 전형이다. 100만 분의 1의 다름에 매료되어 끊임없이 새로운 여자와 관계한다. 그러나 100만 분의 1의 새로움이란 게 얼마나 빨리 사라지겠는가.
토마시의 저 엽기적이고 과장된 행동은 테레자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독자들에게도 한없이 가볍게 느껴진다. 작가 쿤데라가 지향하는 바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로서 일차적으로 모든 것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여 숨도 쉴 수 없게 된 당시 사회 분위기(60~70년대 프라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한 방식이다. 더 나아가 인류가 오랫동안 무게를 실어 온 영혼, 필연, 영원, 사랑 같은 말이 얼마나 인간을 부당하게 억압해 왔는지 고발한다. 소설의 후반부에 나오는 키치 담론은 바로 그러한 무거운 것들이 실은 얼마나 가볍고 참을 수 없는 키치인지 증명하는 데 주력한다. 실로, 참을 수 없는 것은 무거움을 가장한 키치의 가벼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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