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입에 물고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6·25전쟁의 혼란 속에 대구에서 탄생한 '봄날은 간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성황당'은 우리 민족의 무구(無垢)한 종교적 심성을 잘 드러내는 명칭이다. 이 노래가 문인·문객들의 애창곡이 된 것은 '연분홍 치마' '성황당 길' 같은 한국적 감성이 담긴 노랫말 덕분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정비석의 단편소설 '성황당'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산골 아낙네의 때 묻지 않은 삶을 그렸다. 소설 속 주인공 '순이'는 가족의 안전과 행복을 오로지 성황당에 빌며 살아온 순박한 민초(民草)들의 상징이었다. 힘 있거나 재물을 가진 외간 남자의 위협과 유혹에 잠시 이끌리기도 하지만 곧장 제자리로 돌아온다. 성황님을 속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천국으로 유혹하고 지옥으로 협박하는 외래 종교 없이도, 강제적이고 인위적인 규범 없이도, 착한 성정(性情)에 순응하며 살아온 지난날 우리 민족의 한 모습이기도 했다. 예전 우리 시골에는 마을마다 성황당이 있고 당산목이 있었다. 그것은 고대의 '솟대'에서 비롯된 오랜 토속신앙의 유산이다. 사람들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은 성황당과 당산목에 안녕을 빌며 공동체의 삶을 이어왔다.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는 임하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여 있던 당산목을 이식해 보존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수령 700여 년에 무게가 500여t에 이르는 노거수(老巨樹)를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15m가량 수직으로 끌어올리고 흙을 북돋워 심는 고난도의 '상식'(上植) 작업을 진행해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은행나무는 그렇게 부활에 성공했다.
한국의 성황당이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신사(神社)가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소박하고 서민적인 정서의 성황당이 일본에서 초월적인 권위를 지닌 신사로 확대 재건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두려운 자연환경과 권위적 사무라이 문화가 작용했을 것이다. 일본의 신사는 여전히 대다수 일본 국민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지만, 한국의 성황당은 거의 사라지고 노거수의 외형만 남았다. 상식 30주년을 맞은 용계리 은행나무가 '당산나무 할아버지'로 위촉되었다는 소식이 반가운 이유이다.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joen04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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