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새론새평-김성준] 정치적 오염수가 합리성에 스며들고 있다

김성준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김성준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김성준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최근 야당은 정부 여당이 요구한 조건을 담은 특검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면서 여당이 합리적 특검안을 제시하면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때 합리적 안이란 '자신들이 동의할 수 있는' 안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이동통신사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합리적인 요금 체계를 주문했다. 통신비 부담 과중을 언급한 것을 고려하면 장관의 합리적 요금 체계는 '저렴한 가격'을 의미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대구경북신공항 건설사업의 논의에서도 적용 기술과 기법의 측면에서 합리적 개발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각자가 처한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이라는 뜻이 수시로 달라진다.

그렇다면 합리성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근현대 철학의 대표자인 칸트는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적합한 수단을 선택하는 것을 합리성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원한다면 적절한 다이어트와 운동이 선택해야 할 가장 적절한 수단이다. 건강을 원하면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운동을 멀리한다면 누구도 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 조직적인 차원에서도 기업의 경영 전략이나 정부의 공공정책 수립에서도 목적 달성을 위한 효율적 수단의 선택이 핵심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합리성을 현실적으로 해석하는 경제학에서는 비용과 편익을 중심으로 가능한 대안들을 모두 모색하고 평가하여 경제적으로 최적의 선택 대안, 즉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편익을 거둘 수 있도록 선택하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같은 비용편익은 단기가 아닌 장기적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소비자이론 중에 근시안적 모형이 있는데, 이 모형은 어떤 재화에 대한 현재의 소비가 과거의 소비에 영향을 받는다고 전제한다. 생각해 보면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소비는 과거의 소비에 영향을 받는다. 특히, 이런 경향이 강할 때 경제학자들은 그 재화가 중독성이 있다고 부른다. 담배, 술, 마약 등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결국, 합리성에는 장기적인 관점이 내포되므로 지금 당장 기분을 좋게 하고자 마약에 손을 대는 행동은 매우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한편 합리성을 실질적 합리성과 절차적 합리성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주어진 제약 조건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을 실질적 합리성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어떤 내용을 선택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반면 현실적인 관점에서 의사결정의 내용보다 결정 과정이나 절차가 얼마나 합당한 절차를 따랐는지에 중점을 둔 것이 절차적 합리성이다. 즉 절차적 합리성은 내용 자체에 대한 합리성보다 문자 그대로 절차적으로 하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초점을 맞춘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넛지'(Nudge,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로 널리 알려진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모든 의사결정과 행동이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상황과 조건에서는 사람들이 유난히 비합리적인 선택과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트나 백화점에서 할인 판매 중이라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면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충동적으로 구매하는 행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완벽히 합리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 이후, 오늘날 합리성은 중요한 미덕으로 자리 잡아 왔다. 합리성은 개인과 집단의 능률과 성과를 향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자 노력한다. 합리적인 사회란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합리적일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의 정치적 오염은 국가적 이슈의 초점을 흐리게 하고 시민들의 눈을 가려 합리적인 의사결정에 훼방을 놓고 있다. 특히 최근 정치 시장의 소모적인 대립과 정파적 이익의 추구는 합리성을 약화시키고 공익 대신 특정 집단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이제 그 오염수가 정치의 경계를 넘어 우리의 언어와 일상까지 스며들어 합리적인 사회를 꿈꾸는 시민들을 더욱 혼란하게 하는 것 같아 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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