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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부-김태진] 수기(手記)의 추억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아날로그 수기(手記)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마법 같은 힘이 있다. 디지털 감성인 이모티콘과는 감정적 영역이 다르다. 간단한 메모에도 묻어나는 감성은 글씨체가 뿜어내는 '오라(aura)'로 부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심을 담으려 할 때 손 편지는 최적의 효과를 뽐낸다. 문학 작품에서 작품성을 고양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육필 원고를 작품집에 싣기도 하는데 고유의 필체마저 작품의 일부로 녹이려는 목적이다.

30년 전쯤만 해도 대학가는 수기의 천국이었다. 한글 프로그램의 안착과 PC의 대중화가 있기까지 리포트 작성은 순전히 수기로 이뤄졌다. 더구나 캠퍼스의 절반은 플래카드와 대자보가 차지했다. 정치색이 진한 구호는 플래카드에 담고, 설파할 필요가 있는 주제는 대자보에 실었다. 플래카드 제작과 대자보 작성은 당시 학생회 선전부의 주된 임무였다. 특히 대자보에는 필적이 드러나기에 작성자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근래 들어 대자보의 역할을 이어받은 것이 익명을 보장한다는 앱이다. 이 역시나 작성자의 정체를 추정하는 그 나름의 방식이 있다고 한다. 재학생 여부를 가리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져 오답이 나오면 외부인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경북대의 경우 "정보센터에서 어떤 수업을 들었냐"고 물었을 때 수업 이야기를 한다면 영락(零落)없이 외부인으로 판가름 난다. 정보센터의 별칭은 '밥센터'이기 때문이다.

영역 표시처럼 드러나는 선호 표현도 있다. 특유의 어투가 있듯 문투(文套)도 무시할 수 없다. '점점 줄어든다'는 표현으로 '숙지다'를 쓰는 이도 있지만 '사그라들다'를 쓰는 이도 있다. 결코 쓰지 않는 표현은 알리바이 기능도 한다. 조은희 의원이 (통화 여부와 별개로) 명태균 씨를 '영남 황태자'라 했다고 명 씨가 주장했는데 조 의원은 "그런 말은 제 용어가 아니다"고 반박했다.

국민의힘 당원게시판에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비방하는 글이 수백 건 게시됐는데 한동훈 대표와 그의 부인, 장인, 장모, 모친 등 가족의 이름이 작성자로 드러나 소동이 일고 있다. 저열한 표현이 다수 포함됐는데 한 대표 가족이 자주 쓰는 용어인지는 불분명하다. 가능성이 낮다지만 명의 도용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난리 통에는 아날로그 수기의 진심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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