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파시즘의 준동, 폭력의 민낯

[책]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지음 / 민음사 펴냄

[책]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책]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검소하고 꼼꼼한 성격으로 아파트까지 소유한 스물일곱 살의 성실한 가정관리사 카타리나 블룸은 범죄용의자를 숨겨준 혐의로 경찰과 언론의 표적이 된다. 언론의 폭력에 의해 무참하게 명예를 짓밟힌 카타리나는 자신을 모욕하고 세간의 화젯거리로 삼은 기자를 살해한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보이는 폭력을 유발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에 관한 소설이다. 책의 부제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인 까닭이며, 곧 작품의 주제이다.

작가는 카타리나 블룸을 1970년대 독일 경제 기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으로 설정한다. 계획적이고 주체성 뚜렷한 젊고 매력적인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는데 그녀는 나중에서야 그가 수배중인 사실을 안다. 카타리나가 그의 수배 사실을 먼저 알았다고 해도 그를 사랑했을 사람이라고 밝히는 하인리히 뵐은 카타리나 블룸의 성격과 삶의 형태를 그렇게 그려놓는다.

"사랑이란 사회적인 억압을 극복해내기 위한 최선의, 가장 교활하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뉴 저먼 시네마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말이다. 그는 파시즘을 넘어서기 위한 대안은 '사랑' 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영화적 실험을 보여준 인물이다. 사랑이란 게 그렇지 않나. 범죄자를 사랑하는 여인들, 아니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여인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논점은 범죄자를 사랑한 여자가 기자를 총으로 쐈다는 게 아니라, 평범한 여성의 사랑을 왜곡하고 테러리즘으로 윤색하여 세간의 화젯거리로 전락시킨 언론의 무차별 폭력이다. 입증 되지 않은 혐의를 단정하여 단두대의 올리는 폭력은 시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사명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곤 했다.

당초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카타리나를 기사로 난도질한) '차이퉁'의 기자 베르너 퇴트게스가 카타리나 블룸 집까지 찾아와 "우리 일단 섹스나 한탕 하는 게 어떨까?"(140쪽)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총을 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카타리나는 "그저 그를 한 번 보기 위해서였"고 "그 인간이 어떻게 생겼고, 행동거지는 어떠하며, 말하고 마시고 춤추는 모습은 어떤지 알고 싶었"을 따름이었으니까.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언론이 자행한 폭력이 얼마나 단시간 만에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짚어보는 일도 필요하다. 즉 폭력은 순차적으로 오지 않는다는 얘기. 예컨대 박기용 감독의 '폭력써클'에서 모범생 상호가 축구모임을 만들고 사소한 다툼이 큰 싸움으로 이어져 3명을 죽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4주에 불과했다. 폭력이란 어떻게, 얼마나 빨리 인간을 수렁에 빠뜨리며 한 순간 더 큰 폭력으로 치닫게 만드는지, 비극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1970년대 독일사회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정치적으로 과격한 테러리즘이 횡횡했고 적군파로 알려진 바더 마인호프 그룹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라인 강의 기적으로 경제부흥에 성공한 독일사회에는 슬그머니 파시즘의 기운도 싹트고 있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출간된 1974년, 파시즘의 준동을 경계하며 만든 R.W.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가 나온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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