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73>상해 화풍을 소화한 기이하고 예스러운 고사세동도

미술사 연구자

장승업(1843-1897),
장승업(1843-1897),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 비단에 채색, 141.8×39.8㎝,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장승업의 '고사세동도'는 커다란 오동나무를 받침대 위에 올라가 수건으로 닦고 있는 소년이 있고 그 아래엔 바위 옆에서 고사(高士)가 독서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 고사는 원4대가로 꼽혔던 중국 원나라 때 화가 예찬이다. 예찬은 어느 날 그의 집에 묵었던 손님이 밤새 기침을 하자 손님이 떠난 후 방 앞의 오동나무를 씻어내게 했다.

결벽증일 정도로 깔끔한 성격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겠지만 이 일화는 위대한 문인화가 예찬의 남다른 기행에 대한 기념이자 어떤 오염에도 물들지 않겠다는 고결한 의지의 표상으로 여겨지며 고사도(故事圖)의 한 주제가 되었다. 예찬은 그림도 냉랭하게 그렸는데 먹을 극도로 적게 써서 석묵여금(惜墨如金)이라는 말이 생겼다. 먹을 금처럼 아낀 마른 먹과 갈필(渴筆)이 문인화풍으로 여겨지는 데는 예찬의 영향이 크다.

소년이 청소하는 모습도 그렇지만 고사의 책을 높이 든 독서 자세, 바위에 기대앉아 다리를 꼰 포즈, 고개를 한껏 치켜든 오만한 얼굴 표정 등 인체 비례의 왜곡과 동작에서 드러나는 장식적인 우아함이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묘하게 고전적인 느낌을 준다.

장승업은 고사도, 신선도 등 전통적인 주제의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화풍은 유례없이 새롭고 개성적이다. 화면을 압도하는 오동나무는 짙고 옅은 푸른색으로 입체감을 주며 필선을 중복해 몸체를 회오리치듯 뒤틀리게 묘사했고, 같은 색조인 잎사귀들은 세로로 긴 화면에 맞추어 앞으로 쏟아지듯 배치했다. 예찬이 아낄만한 신비한 분위기의 오동나무다.

세밀한 가는 필치는 예리하면서도 유연하고, 색채는 불투명한 흰색 물감인 호분을 능숙하게 활용해 묵직하면서도 맑은 기운을 잃지 않았다. 배경만 바탕을 남겨두었고 인물과 나무, 바위, 기물 등에는 여백 없이 물감을 다 칠해 묘한 실물감을 준다.

이 작품에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 제(題) 오원(吾園) 화(畵)"라고 써넣은 것은 근대기의 대가인 안중식이다. 글을 몰랐던 장승업의 그림에는 낙관이 없는 경우도 있고, 인장만 찍혀 있기도 하며, 누군가가 대신 낙관을 하기도 했다. 장승업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여기저기 떠돌다 서울로 와 남의집살이를 하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주변의 도움을 받아 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장승업을 후견한 이응헌, 변원규, 오경석, 오경연, 오세창 등은 중국어 역관이다. 이들의 조력으로 장승업은 당시 상해에서 발행된 석판본(石版本) 화보를 배우며 최신의 해외 화풍을 배울 수 있었다. 장승업은 이전의 화가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자료로 공부했다. '고사세동도'가 보여주는 과장된 고전성과 환상적인 박진감이 넘치는 기고(奇古)함은 장승업의 천재성과 상해 화단의 유행 화풍이 만난 결과다.

미술사 연구자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