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사랑'(1857)은 막스 뮐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소설이다. 그의 본업은 소설가가 아니라 교수였고 언어학과 종교학의 대가였다. 19세기 후반에 나온 그의 많은 연구가 아직도 학계의 논제가 될 만큼 뛰어난 학자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뮐러는 '독일인의 사랑'으로 더 유명하다. 한때 이 소설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인기가 높아 독일 쪽에서 놀라워했다. '소나기'(황순원) 류의 지고지순한 러브스토리가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린 것 같다. 그러나 좋은 러브스토리가 그렇듯이 이 '독일인의 사랑'도 사랑만으로 직조된 것은 아니다. 뮐러에게 사랑은 하나님과 자연이라는 정원에서 피는 꽃 같은 것이다.
이야기는 화자 '나'의 회상으로 전개된다. 평범한 시민 계층의 '나'(화자)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후작의 성에 갔다가 병상에 있는 후작의 딸(마리아)을 만난다. 얼굴은 창백하지만 "눈에 깊은 신비가 깃든" 아름다운 소녀다. 연민과 동시에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이후 '나'는 가끔 성에 가 마리아의 말동무가 되기도 하고 그녀의 동생들과 놀기도 한다. 정이 들었는지 마리아는 자신의 생일날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소년에게 준다. 그러자 소년은 "네 것은 내 것이니" 계속 끼고 있으라고 하다. 조숙한 소녀는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대꾸한다. "너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을 하는구나." 예수님의 명언이다. 불치의 병에 걸린 마리아는 실상 신앙으로 버텨오고 있다.
마리아에 대한 '나'의 마음은 깊어지나 주변의 시선 때문에 만남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그러던 차에 소년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난다. 수년이 지나 대학생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나'는 다시 마리아를 만난다. 그는 사실 한 번도 마리아를 잊은 적이 없고 마리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마리아는 감정의 표출을 애써 자제한다. 감정의 격랑을 낮추기 위해 영어를 섞어 쓰는가 하면 음악으로 마음을 표현하곤 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대부분 종교에 관한 것이다. 책 한 권이 중요한 매개가 되는데, 그간 마리아의 신심을 키워 준 '독일 신학'(14세기 요하네스 타울러가 저자라 추측)이다. 마리아는 "이름 모를 옛 학자의 가르침이 빛처럼 내 안에 스며들면서 마음의 어둠을 밝게 비춰 눈을 뜨게 해줬다."라고 한다. 영성 체험을 중시하는 신비주의 신학자의 영향을 받은 마리아는 사랑도 영성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사랑을 해보지 않은 자는 사랑받아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마리아는 '나'에 대한 마음을 조금은 고백한 셈이다.
'나'도 마리아에 못지않게 신앙이 돈독하지만 결이 좀 다르다. 그는 피 끓는 청년으로서 세속의 행복도 신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마리아는 살짝 반발하며 영원한 휴식(죽음)을 동경하고 그것만이 희망인 사람도 있다고 자신의 처지를 변호한다. 그녀는 "어린아이가 치마에 가득 모은 꽃잎을 아낌없이 잔디 위에 흩뿌리듯" 자기 생각을 풀어내지만 '나'에 대한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는다. 청년은 안타까운 듯 말한다. "사랑하는 이여! 그런 관습에 가슴과 입이 마비되어 우리마저 벙어리가 되어야 할까요." 그렇게 두 청춘은 신학과 음악과 시를 사이에 두고 플라토닉 러브를 이어간다. 이마저도 오래 가지는 못한다.
마리아의 주치의가 청년에게 찾아와 협박 반 간청 반의 목소리로 마리아를 더는 만나지 말라고 한다. 감정이 고조되는 것은 마리아의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이란다. 뒤에 밝혀지듯이 여기에는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 '나'는 의사의 충고를 따르기로 하지만 "단 한 번 사랑하고 영원히 고독해야 하는" 운명을 한탄한다. 사랑의 고통은 사람을 한 군데 머물지 못하게 한다. '나'는 멀리 티롤로 여행을 떠난다. 오스트리아 티롤은 천혜의 절경이다. '나'에게 타지의 자연은 상반되는 두 가지 이미지로 다가온다. 낮에는 찬란하고 오묘한 아름다움이지만 밤에는 고독과 불안을 더하는 자연이다. 그 모든 감정의 기복에는 언제나 마리아가 있다.
티롤의 풍광을 방랑하던 '나'는 불현듯 마리아가 티롤의 별장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수소문하여 호숫가에 있는 고성 별장에 들어간 '나'는 꿈처럼 마리아를 만난다. 이 기적 같은 조우에서도 두 사람의 데이트는 시와 신앙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특히 두 편의 시가 주제화된다. 워즈워스의 '고지의 소녀'와 미켈란젤로의 '소네트'다. 전자는 일상적인 자연의 신비를 노래하고, 후자는 미는 천상으로 가는 길의 안내자라는 미켈란젤로의 미학을 담고 있다. 워즈워스의 서정시가 괴테나 실러의 고전 시보다 더 아름답다고 비평하고, 지상의 미와 천상의 미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의견이 오간다.
이렇게 시적 데이트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밤이 되어 성 뒤쪽의 언덕 너머로 달이 뜬다. 달빛이 마리아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나'는 참을 수 없는 감정으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마리아의 얼굴에는 피곤과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나'에게 그만 돌아가라고 한다.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피곤에 지친 몸을 눕혀야 하기 때문이다. 고성을 빠져나온 '나'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듯 밤길을 터벅터벅 걷는다. 지구는 관이고 하늘은 관 뚜껑이다. 그러나 그때 반짝이는 두 개의 별이 눈에 들어오고 자기도 모르게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온다.(89) 자신이 마리아와 영원히 결합해 있음을 느낀다.
다음 날 전달된 마리아의 편지에는 이틀 동안 오지 말라고 쓰여 있다. 인생의 책 두 페이지가 찢겨나가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어찌하랴. 고통은 신의 섭리이고 인간은 그저 기도할 수밖에. 이틀 뒤에 마리아에게 가니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마지막을 선언한다. '나'는 세상의 눈 때문에 가장 신성한 것을 가장 천한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며 항변한다. 그러자 마리아는 생뚱맞게도 왜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청년을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한다.
왜냐고? 어린아이에게 왜 태어났냐고 물어봐. 들에 핀 꽃 보고 왜 피었느냐고 물어봐. 태양에게 왜 빛을 비추냐고 물어봐. 내가 널 사랑하는 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야.(103)
'나'는 더 나아가 신이 마리아에게 고통을 준 것은 자기와 나눠 가지라고 준 것이라고 강변한다. 고통을 함께하는 것은 배가 돛을 달고 가야 폭풍을 헤치고 항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비유도 든다. 마침내 마리아는 마음의 빗장을 연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포옹하고 키스한다. 시간은 두 사람을 위해 멈추고 세상에는 둘만 존재하는 것 같다. 마리아는 깊은숨을 토해내며 말한다. "하나님이시여, 이 행복을 용서해주소서." 마리아와 헤어져 집으로 와 뒤척이고 있는 '나'에게 주치의가 찾아와 마리아의 죽음을 알린다. 그녀의 부탁이라며 '주님의 뜻대로'라는 글이 새겨진 반지 하나를 건네준다. 그리고 의사는 자신의 인생 비밀을 말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평생 사랑한 여인의 딸이라고. 둘은 서로 사랑했으나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어 헤어졌다는 것. 후작과 결혼한 그녀는 아이를 낳다 죽고 그 아이가 바로 마리아라는 것. 그는 병약한 마리아를 죽은 애인을 다시 만난 것처럼 아끼고 돌보아 준 게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의사는 마지막으로 청년에게 한마디 하고 떠난다. "마리아와 같이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 사랑하다 잃어버렸음을 신께 감사하게."(106)
이후 세월이 흐르지만 마리아에 대한 '나'의 기억과 사랑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회상의 형식으로 쓴 것이 '독일인의 사랑'이다. 이제 자연스레 의문 하나가 일어난다. 과연 저 플라토닉 러브가 독일적 사랑을 대표한단 말인가? 혹 19세기 전반기엔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나 20세기를 거친 지금은 아닐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보편적이라 하기에는 너무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다. '독일인의 사랑'은 신심 깊은 뮐러가 신적 섭리와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사랑을 삼위일체로 결합하여 직조해 낸 희망의 서사다. 종교학의 대가인 뮐러는 하나의 신만 아는 자는 하나의 신도 모른다고 했거니와, 같은 논리로 사랑은 홀로 설 수 없고 신성과 자연이 버팀목이 되어줄 때만 아름답게 빛난다고 설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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