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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 집 떠난 어머니, 말기 암 아버지…단전 위기의 네 자매

초등학교 때 갑자기 집 나간 어머니·난폭해진 아버지
고모 손에 자라며 최근 수능 치러
형편 어려워 대학 진학 걱정…실질적 가장 역할도 해야

허윤서(17·가명) 양이 공장을 개조한 곰팡이 핀 낡은 집에서 고모와 대화하는 모습. 김지효 기자
허윤서(17·가명) 양이 공장을 개조한 곰팡이 핀 낡은 집에서 고모와 대화하는 모습. 김지효 기자

떠나간 이를 향한 원망과 그리움이 무뎌지는 순간을 아는가. 하루 아침에 연락이 끊긴 어머니와 어머니가 떠난 후 폭력적으로 변한 아버지. 그 사이에서 10년간 방황하던 허윤서(17·가명) 양에게 남은 건 누군가를 향한 요동치는 감정이 아닌 미래에 대한 불안감뿐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윤서 양 앞에 닥친 현실은 자신이 곧 이 집의 가장이 돼야 한다는 것. 전기세가 수 개월 치 밀려 단전을 앞둔 집에서 윤서 양은 걱정을 관두지 못한다.

◆어머니 집 나가고 아버지 암 투병…고모 손에 자라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난 윤서 양은 초등학교 이후로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경북의 한 시골에서 8살 많은 자신의 누나에게 얹혀살며 공장 일을 돕던 윤서 양 아버지는 40대 중반에 누나 주선으로 베트남 여성과 국제결혼을 하게 됐다. 부부는 네 자매를 낳았고, 매달 어머니가 베트남으로 보내는 돈은 아버지 대신 국가 지원으로 재활용 공장을 차린 고모가 내줬다.

큰 문제 없이 지속되는 것 같던 일상은 윤서 양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깨졌다. 가족들과 교회를 다녀온 주말이었다. 집에 계셔야 할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윤서 양은 고모를 통해 뒤늦게 어머니가 베트남으로 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식들에게 기별 하나 없이, 갑작스런 생이별이었다.

2년 뒤 베트남에 놀러 간 동네 주민을 통해 어머니가 일하는 곳을 알게 된 고모는 윤서 양 아버지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막내를 베트남으로 보냈다. 빚을 갚아주면 한국으로 가겠다던 어머니는 그해 6월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까, 가족들이 교회에 간 틈을 타 어머니는 막내 통장에 든 돈을 갖고 다시 집을 나가 연락이 끊겼다. 몇 년 뒤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같이 살며 임신한 아이를 호적에 올리고 싶다며 찾아왔을 때를 제외하면 얼굴을 본 적도 없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로 점점 과묵해지던 아버지는 윤서 양에게 이따금 손찌검을 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윤서 양 이마에 있는 패인 자국은 아버지 때문에 생긴 상처다. 윤서 양과 자매들을 친부모처럼 돌봐준 사람은 고모였다.

학교를 마치고 공부방에 갔다가, 아버지 차를 타고 귀가해 바로 잠이 드는 게 윤서 양 일상이었다. 고모를 제외한 가족들과의 대화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했다. 얼굴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피를 쏟아서 병원에 간 아버지는 급성 혈액암 말기를 진단받고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수혈과 항암치료를 동시에 받아야 하는 아버지 병원비가 수천만원이 든다는 건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버지와 고모를 포함해 직원이 세 명이던 공장은 거의 돌아가지 못해 형편은 점점 나빠졌다. 윤서 양이 할 수 있는 건 외출 횟수를 줄이는 것이었다. 매달 내던 학원비도 몇 달씩 밀렸는데, 다행히 윤서 양은 원장 선생님의 도움으로 중학교 3학년까지 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

◆수능 치르고 대학 발표 기다려…집 단전 될까 걱정

고등학교에 진학한 윤서 양은 화학연구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과를 선택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원은 다니지 못했고, 열심히 학교 수업을 듣고 독학으로 좋은 성적을 냈다.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마을을 떠나 대학은 타지로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수험생활을 시작한 게 올해였다.

주 6일 온종일 공부를 하다 집에 돌아오면 윤서 양을 반기는 건 방안에 핀 곰팡이였다. 여름에는 에어컨이 없어 더위가 그대로 느껴지고, 겨울에는 날이 추우면 수도관이 얼어서 물이 나오지 않는, 공장 한 편을 개조한 집. 이따금 암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아버지와 집을 떠나 연락도 닿지 않는 어머니 생각이, 그리고 어려운 형편에 대학을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우울감이 윤서 양을 집어삼키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수능을 치렀고, 오는 12월에 있을 합격 발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서 양은 그동안 자신을 거둬 길러준 고모에게는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언니와 셋째 동생은 장애가 있어 앞으로 실질적인 가장 행세를 해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고모의 월수입은 백만원 남짓, 윤서 양 앞으로 나오는 네 자매의 수급비도 백만원 가량뿐. 윤서 양은 집안에 도움이 되고 싶어 최근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등을 시작했다.

항상 조카들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70대 고모는 공장을 운영하며 빚만 쌓아가고 있었다. 월 700만원 가량의 밀린 전기세가 이번 달로 벌써 3개월째, 한 달 치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단전이었다. 매달 아이를 키우는 데 명당 70만원이 드는 데다 윤서 아버지 간병비로 백만원 가까이 나갔고, 그동안 빚진 병원비로 월 15만원, 공장 차리느라 빌린 1억원에 대한 이자 77만원 등이 고정 지출이었다. 생활이 어려워 국세도 5천만원 가량 밀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모는 똑똑한 윤서 양을 학원에 못 보낸 걸 아쉬워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자신의 학업을 도운 고모를 보며 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미안해하는 윤서 양은 "집에 빚이 많아서 등록금이나 기숙사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조용히 걱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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