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2월 9일 부산항 제3부두. 이윽고 미군 수송선에서 청룡부대 장병들이 쏟아졌습니다. 파월 6년만. 김종필 국무총리, 3부 요인, 가족·학생·시민 수만명이 성대히 맞았습니다. 비둘기·오색 풍선이 하늘을 수놓고, 다섯 대의 경비행기에서 뿌린 꽃가루가 부두를 뒤덮었습니다. 부산 데레사여고생들의 합창 '개선 행진곡'은 청룡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남(자본주의)과 북(공산주의)이 싸운 베트남 판 남북전쟁, 월남전(越南戰·1955∼1975).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전쟁에 뛰어든 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존슨 미 대통령, 응웬칸 남베트남 총리가 잇따라 우방국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존을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1964년 9월 의무중대, 태권도 교관단 파병. 이듬해 3월엔 백구부대(해군수송단)와 비둘기부대(건설지원단)가 출병. 9월엔 포항에서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가 군장을 꾸렸습니다. 이어 맹호(수도사단)·십자성(군수사령부)·백마(제9사단)·은마(공군지원단)부대가 1967년까지 잇따라 전장으로 향했습니다. 일 최대 상주 병력 5만명. 미군 다음으로 많은 파병이었습니다.
"한국군과 교전은 피하라." 얼마나 독했던지 월맹(북베트남) 수장 호찌민은 혀를 내둘렀습니다. 1966년 6월, 호찌민도 도리 없이 김일성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해 10월부터 북한이 파병한 규모는 조종사 96명 등 384명의 공군 전투부대와 소규모 비전투부대(베트남 측 기록). 다 합쳐도 1천명 안팍. 얼굴도 못들 형편이었지만 김일성은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공작원 31명이 30kg 군장에 시속 10km로 산을 타 청와대 코앞까지 들이쳤습니다. 허가 찔린 1·21 사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생포된 김신조의 기자회견은 국민들은 경악했습니다. 그 다다음 날, 북한은 자기네 영해를 침범했다며 공해상에 있던 미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호'를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1월 26일, 박정희는 즉각 보복을 명령했습니다.
김신조 일당과 똑같은 31명으로 1968년 4월에 북파키로 했습니다. 그래서 '684북파부대', 실미도 부대가 급조됐습니다. 이어 4월 1일엔 향토를 지키자며 예비군을 창설했습니다. 이런 우리를 시험하듯 북한은 그해 10월부터 늦가을까지 울진·삼척에 무장 공비를 120명이나 풀었습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아홉 살 이승복을 공비들은 입을 찢어 죽였습니다.
간첩을 가려내려 11월 21일부터 주민등록증이 발급되고, 이듬해(1969년) 1월 9일엔 고교에 교련이 도입됐습니다. 유사시 학생도 동원키 위한 조치였습니다. 북한은 그러나 꿈쩍도 않았습니다. 그해 3월 주문진에 무장공비 침투, 4월 미 정찰기 격추, 6월 흑산도에 간첩선 침투, 12월엔 강릉발 서울행 칼(KAL)기도 납치해 갔습니다. (매일신문 1965년 9월 20일~1973년 2월 3일자)
파병을 막겠다고 이렇게 들쑤셨지만 김일성의 계략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1964년부터 1973년 철군까지 베트남 파병 연 인원은 무려 32만명. 그 대가로 중화학 공장을 지어 수출하고, 경부고속도로를 닦고, 군장비도 현대화했습니다. 북한에 밀리던 군사·경제력이 보란 듯이 앞지른 시기도 이 무렵. 그때 박정희는 김일성보다 몇 수 위였습니다.
2022년 2월 24일,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금방 끝낸다던 전쟁이 3년째 수렁에 빠졌습니다. 이번엔 김정은이 결단했습니다. '러시아의 요청'은 명분. 파병 대가는?고립무원 김정은의 속내는? 베트남 파병 60년 만에 남북이 또 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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