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가 빽빽한 선면에 작은 그림이 더해져 있다. 1919년 여름 서예가 김돈희가 글씨를 쓰고 화가 이한복이 그림을 더한 '감음도'다. 술항아리를 옆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는데 술잔은 한 사람만 들었다. 그림 오른쪽에 무호(橆号) 이한복이 그렸다는 서명과 인장이 있다.
글의 내용이 재미있다. 특이하게도 현명한 술 마시기에 대한 지침 18 조목이다. 음주의 규칙으로 정한 '주정(酒政) 18칙'을 큰 글자로 제시해 놓고 각각에 해당하는 구체적 사례를 작은 글씨로 열거했다. 그중에서 2번째, 14번째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부득불음(不得不飮)/ 부득이 마셔야 할 때
봉고우(逢故友) 신양숙(新釀熟) 우득선품(偶得鮮品) 청신성(聽新聲) 우창(雨窓) 미희선권(美姬善勸)/ 옛 친구를 만났을 때. 새 술이 익었을 때. 우연히 신선한 안주를 얻었을 때. 새로 지은 시를 들었을 때. 창밖에 비 올 때. 아름다운 여인이 권할 때.
음중불가유(飮中不可有)/ 음주 중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
설가무(說家務) 담시정(談時政) 위도학(僞道學) 유통문(謬通文) 어언기자(語言譏刺) 험령군인(險令窘人)/ 가정사 이야기. 정치 이야기. 가짜 도학(道學). 헛소문 유포. 헐뜯고 비꼬는 말. 궁지에 몰린 사람을 험담하는 일.
이런 주도(酒道)를 마음에 새겨둔다면 운치 있는 술자리가 되리라. 이한복이 23세, 김돈희가 49세 때다. 김돈희와 이한복은 술 마시는 일을 긍정하며 음주의 필요와 의의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음주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함부로 술자리를 갖지 않고 절제하려는 결심으로 이렇게 합작했다.
주도의 한 선례로 중국 명나라 화가이자 문인인 오빈의 '주정 육칙(酒政六則)'이 있다. 음인(飮人), 음지(飮地), 음후(飮候), 음취(飮趣), 음금(飮禁), 음란(飮闌) 등 육음(六飮)으로 함께 마시는 사람, 마시는 장소, 마시는 때, 마실 때의 취향, 마시기를 금할 때, 마시기를 피해야 할 때 등이 있다고 했다.
김돈희의 '주정 18칙'은 이보다 항목이 3배 많고 사례도 실감 난다. 김돈희와 이한복은 술이 당길 때, 술이 잘 넘어갈 때, 술맛 떨어질 때 등의 경험을 서로 돌이켜보며 이렇게 정리했다. 음주가 고상한 정신세계를 추동하는 행위가 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후회되는 음주를 많이 경험했기에 소지품인 부채에 이렇게 적어놓음으로서 항상 명심하려 했을 것이다. 이들의 진지한 고민에 공감이 가고 술의 위력이 실감 난다.
손에 쥔 부채의 이 '주정 18칙'이 잘 지켜졌는지는 의문이다. 2024년 한 해를 잘 마무리해야 할 송구영신의 12월, 송년회의 계절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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