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요일 아침-권은태] 연말 단상

권은태 (사)대구문화콘텐츠플랫폼 대표

권은태 (사) 대구문화콘텐츠플랫폼 대표
권은태 (사) 대구문화콘텐츠플랫폼 대표

그새 또 연말이다. 지난 기억들이 뒤섞이고 아주 오래갈 성싶던 장면들도 슬며시 흐릿해진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도 있다. "이번 '윤한 갈등'에서 누가 이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초, 한 여론 조사 기관이 국민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순간 뜨악했다. 그게 중요한가? 누가 더 바람직해 보이는가를 물었어야지.

그렇게 해 버리면 대통령과 집권당의 비대위원장이 결투를 벌인 게 되고 국민은 피를 보고 흥분한 콜로세움의 관중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아무렴, 세상은 개의치 않았고 설문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누가 이긴 싸움 같으냐 물었고 아무렇지 않게 많은 이들이 그에 답했으며 또 아무렇지 않게 언론이 몇 대 몇, 승자와 패자를 발표했다. 올해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선거철이 다가오자 그런 질문들이 더 흔해지고 당연시되었다. '무엇이 더 옳은가?'라는 물음은 사라지고 '누가 더 센가?' '누가 더 많이 때렸는가?' 그래서 '누가 이겼는가?' 등의 말들이 넘쳐났다. 언론은 그런 재미에 빠진, 눈에 핏발 선 이들을 위한 바람잡이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누구의 형세가 더 유리한지, 따르는 무리가 얼마인지, 심지어 누구는 키가 크고 몸매는 어떻다는 둥, 온갖 정보를 퍼다 날랐다.

그러면서 정작 물어야 할 건 묻지 않았고 전해야 할 것 또한 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선거판을 싸움판으로 만든 주역은 총선에 참여한 주요 정당과 그 후보들이었다. 그들은 공약을 말해야 할 때 상대를 욕했고 비전을 얘기해야 할 때도 상대를 욕했으며 심지어 사과를 해야 할 때도 상대를 욕했다.

여당은 야당을 범죄 집단이라 했고 야당은 여당을 악의 세력이라 했다. 그러고선 "더 나은 삶을 원하는가? 우리에게 표를 달라,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표를 달라, 우리에게 표를 주면 투표의 효능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를 공히 외쳤다. 그래서? 올해가 다 가는 지금, 뭐가 달라졌는가? 달라진 건 금배지를 단 그들의 삶이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열심히 싸우고 집에 가면 안온한 삶이 기다릴지 모르나 국민은 그렇지 않다. 주거비, 식비, 일자리, 물어야 할 이자, 줄어든 손님 등 사는 게 고달프기 이를 데 없다. 문재인 정부가 말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나라는 오간 데 없고 윤석열 정부가 말한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또한 오리무중이니 투표의 효능감? 그게 다 뭔가 싶다.

그럼에도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그저 늘 하던 소리를 습관처럼 또 할 뿐이다. 그리고 짐짓 화를 낸다. 그런데 그 화를 내는 사람이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일 땐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언젠가 민생토론회를 본 누군가가 말했다. "세금을 뜯어낸다, 때린다." 대통령의 말본새가 왜 저러냐고. 그의 말처럼 대통령은 여차하면 싸울 것처럼 표정 짓고 혼내듯 말한다.

'용서와 화해' '포용과 화합' '존중과 배려' 같은 말들을 그에게서 들어본 기억이 없다. 반면 뭔가를 소탕하고, 척결하고, 엄벌하겠다는 말들은 숱하게 들었다. 원래 그런 건 경찰청장이나 법무부 장관 등이 하던 말이었다. 그걸 대통령이 하면 무심하던 사람도 괜스레 불안해진다.

국회가 개원해도 가지 않고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도 하지 않는 대통령, 그 마뜩잖은 심기와 화난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우리가 참고 살듯 대통령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러질 않는다. 게다가 대통령실을 둘러싼 추문이 끊이질 않는다. 국민의 걱정을 떠안아야 할 대통령이 거꾸로 국민에게 걱정거리를 안겨주고 있는 격이다.

이제 곧,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있다면 그건 'tariff(관세)'라고 한 트럼프가 돌아온다. 그런데 거기에 대비하려고 골프를 쳤다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민망해 차마 고개를 못 들겠다. 양극화 해소를 위해 대통령실이 다각적으로 정책을 검토 중이라고도 하나 그 또한 하나 마나 한 소리다. 보다 구체적이고 정량적인 방법과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내일이 어떨지 국민이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 이른바 '당원 게시판' 논란이 데자뷔처럼 연초의 '윤한 갈등' 질문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정치가 비루하면 세상이 거칠어진다. 먹는 것, 입는 것, 심지어 병원 가는 것까지 뭣 하나 쉬운 게 없다. 그렇지만 내년, 또 그다음 해에도 국민은 언제나처럼 살아 낼 것이다. 그리고 늘 그랬듯 다시 희망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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