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미나 레자의 희곡 '대학살의 신'이 출간된 건 2006년이다. 그해 12월 프랑스에서 연극이 초연되었고 2008년엔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2009년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에서 각광을 받으며 토니 상까지 거머쥐는 쾌거를 올린다. 국내에서는 2011년 초연했는데 최정원 남경주 송일국 이지하가 무대에 올랐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대학살의 신'이 나왔을 때, 먼저 떠올린 건 루이스 부뉴엘의 '대학살의 천사'였다(물론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다음은 연극무대의 장광설을 어떤 미장센으로 재현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연극을 영화로 만드는 게 모험인 건 입체보다 평면에서 몰입감이 극대화될 수 있다는 점 때문. 연극 연출자가 영화감독까지 맡는 일, 예컨대 엘리아 카잔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 모두 연출을 맡았고, 밥 포시가 '시카고'의 뮤지컬과 영화를 연출한 건 이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선 한 때 장진이 대학로 연극무대를 스크린으로 옮기곤 했지만, 제대로 평가받은 건 김광림의 '날 보러 와요'를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으로 영화화한 정도가 고작이다.
어쨌든 영화를 보았을 때, 조디 포스터와 존 C.라일리와 케이트 윈슬렛과 크리스토프 왈츠의 연기는 천의무봉이었고, 엄청난 대사분량에 기함했다. 동시에 대체 이런 극본을 쓴 작가는 어떤 사람인지, 즉시 원작을 읽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야스미나 레자 희곡이 연속으로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에 주저 없이 서점으로 향했다. 이 글은 책을 손에 쥔 날 밤에 독파한 결과이다.
11월 3일 17시 30분, 아스피랑-뒤낭 공원에서 11살 페르디낭 레유가 막대기로 브뤼노 울리에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 행위의 결과로 브뤼노는 윗입술이 붓고 타박상을 입은 것 외에도 앞니 두 개가 부러졌으며, 오른쪽 앞니는 신경까지 손상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가해 아이의 부모 알랭과 아네트가 치료와 사과 등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미셸과 베로니크 울리에 집을 방문한다. 이제부터 '말꼬리 잡기 신공'이 펼쳐진다.
언제나 그렇듯 시작은 그럴싸하다. 상대를 존중하고 품위를 지키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니까. 그러나 객관과 교양과 이성은 곧 쓰레기통에 처박힐 터다. 클라이언트에게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변호사 알랭. 알랭에게 묘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가정용품 판매업자 미셸은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의 아내 베로니크는 진보적 의제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면서 정치적 올바름을 믿고 따르는 인물. 다르푸르 비극을 다룬 책을 쓸 정도로 문명과 사회, 제3세계 문제에 관심이 지대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집안의 의견은 엇갈리고, 모인 목적은 안드로메다로 향하며, 급기야 계급갈등의 기운이 피어오른다.
클라푸티를 먹고 음료와 콜라와 위스키를 마시다가 시가를 피우는 동안, 아네트가 토하여 남편의 바지와 베로니크가 아끼는 도록을 훼손하는 동안, 서로를 질타하고 조롱하며 혐오하는 동안, 말쑥하게 차려입고 등장한 네 명의 어른은 코흘리개 아이로 퇴보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쉴 새 없는 말의 성찬. 마치 권투시합에서 상대선수의 잽을 피해 카운터블로를 날리는 반응속도처럼 네 남녀의 입에서 쏟아지는 십자포화는 미셸과 베로니크의 아파트를 야만과 문명이 뒤엉킨 대환장 파티로 둔갑시킨다. 이 모든 상황을 전지전능한 시선으로 주관하는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필력이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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