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이춘근] 트럼프, 취임도 하기 전에 바뀌는 세상

이춘근 국제정치학자

이춘근 국제정치학자
이춘근 국제정치학자

'영웅은 시대를 만들고(英雄造時) 시대는 영웅을 만든다(時造英雄)'는 말이 있다. 역사를 인물 위주로 보는 입장이기에 국제정치학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다. 국제정치학은 인물보다는 국가의 힘 혹은 국제 체제의 힘의 구조가 세상을 보는 더욱 중요한 변수라고 생각해 왔다. 이 같은 국제정치학적 전통에 의하면 히틀러가 없었어도 2차 세계대전은 발생했을 것이고,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대통령이 부시가 아니라 해도 미국은 유사한 모습으로 반응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1개월 전 트럼프가 미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아직 그가 정식 대통령으로 취임하기도 전에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면 국가의 힘과 국제정치의 구조 못지않게 국가 지도자 개인에 따라 세상이 대폭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미국의 국력은 바이든의 시대나 트럼프의 시대나 변한 바가 별로 없다. 지난 4년(2021~2024년) 바이든의 미국은 그 이전 4년(2017~2021년)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일했던 미국과 국력 면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미국의 국제적인 지위도 트럼프 시절이나 바이든 시절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국이 국제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미국의 절대적인 국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패권국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난 8년을 살펴보면 세계가 미국을 대하는 태도는 확실히 달랐다. 트럼프 재임 시 세계는 비교적 조용했다.

어느 추운 날 트럼프와 만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었던 시진핑이 트럼프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자 황급히 주머니에서 손을 빼서 차렷 자세를 하는 모습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러시아의 푸틴도 트럼프에게 우호적으로 대했고 북한의 김정은도 트럼프를 '각하'라고 칭하며 아부를 떨었다.

세상의 독재자들이 트럼프를 두려워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원인인지 알 수 없겠지만 트럼프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고 또 미국을 골치 아프게 할 만한 제3국 간의 전쟁도 발발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트럼프는 2024년 선거전을 치르면서 '4 Years 0 War'(4년 동안 전쟁 무)라는 구호를 즐겨 사용했다.

반면 바이든 재임 기간 초반 2년여 동안 세계에는 두 개의 큰 전쟁이 터졌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돼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며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발발해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두 개의 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분석가들은 세상의 불량국가 독재자들이 바이든을 테스트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며 바이든의 무능한 외교를 비난했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행해진 여론 조사에서 미국 국민들의 62%는 트럼프가 대통령이었다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할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대답했을 정도다. 하마스 역시 트럼프 임기 동안은 잠잠했었다.

트럼프 당선 직후 페루에서 열린 아태 정상회담의 공식 기념 촬영 시 바이든 대통령은 뒷자리 맨 오른쪽에 배정받는 수모를 당했다. 미국 여론은 바이든의 자업자득이지만 미국이 모욕을 당한 것이라며 분노했다. 국명 ABC순이라 하지만 미국 대통령이 그런 자리를 배정받은 적은 없었다. 트럼프라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놀라운 일은 트럼프가 아직 취임하지도 않았지만 각국 지도자들이 트럼프의 비위를 건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하마스가 휴전을 원하고, 시진핑이 미국과의 평화 공존을 원한다고 말했으며 푸틴은 언제라도 대화가 가능하다고 했다. 하마스 지도자를 은닉시켰던 카타르 정부는 그들에 대한 추방 명령을 내렸고, 러시아 가스를 구입한다며 깐죽대던 EU는 미국의 가스를 수입하겠다고 납작 엎드렸다.

불법입국자들을 떼 지어 미국으로 보내던 멕시코 정부가 불법입국자 행군 대열을 와해시켰으며, 트럼프를 조롱하던 캐나다 트뤼도 총리는 트럼프의 저택으로 날아가 캐나다를 죽일 수 있는 25% 관세를 제발 거두어 달라고 사정했다. 바이든과 트럼프는 비숫한 힘을 가진 같은 나라의 지도자들이지만 힘을 쓰려는 의지와 결단이 있는 지도자와 그렇지 않은 지도자가 얼마나 다른지를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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