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김태진] "믿어 주세요."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1987년 대선에서 '보통 사람'을 표방한 노태우 후보는 "이 사람, 믿어 주세요"를 자주 썼다. 아이들이 따라 할 정도였고 개그 코너의 유행어로 활용되기도 했다. 군인 출신으로 12·12사태의 주역이라는 약점을 희석해야 했다. '군정 종식'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맞설 구호였다. 일개의 보통 사람이라는 이미지 설정은 서민들의 친밀감을 높이는 효과적인 카드였다.

믿음의 징표(徵表)가 요구될 때 대개 말잔치에 그친다. "하늘의 별을 따주겠다"는 프러포즈만큼 로맨틱한 경우도 있지만, "어떻게 하면 믿어 주겠냐"는 적반하장식 으름장도 효력이 강하다 보기 어렵다. 그래서 거짓말이 예사(例事)인 불륜 등 배반의 사건에는, 구속력이 그나마 있는 각서가 요구된다. 사기 피해자가 되지 않겠노라며 차용증을 쓰라는 것도 상식적 수순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반국가 세력 척결을 이유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마지막 말로 "저를 믿어 주십시오"라고 했다. 하루 전날 충남 공주 산성시장에서도 DJ석에 앉아 "여러분들 저 믿으시죠? 저희를 믿고 용기를 잃지 말고…"라며 믿음을 얘기했다. 그러나 국민에게 믿음을 심어 주는 평소의 노력과 우호 여론이 있었다면 계엄령 선포는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습관성 탄핵을 남발하던 더불어민주당에 맞서 대통령 거부권에만 의존하면서 불통 이미지만 쌓였던 터다.

설상가상 비현실적 비상계엄 선포가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신뢰마저 깬 것으로 비쳤다. 다만 계엄군과 국민 사이의 믿음은 확고했던 것으로 보였다. 뭔가 어설펐던 계엄군에겐 억지로 끌려 나온 듯한 동작이 많았다. 시민들도 공격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우리 군이 우리 국민을 향해 발포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안귀령 민주당 대변인이 "부끄럽지도 않냐"며 계엄군의 장비를 잡아 흔든 걸 계엄군이 총구를 들이밀어 위협했다고 몰아붙인 이들이 있었다. 총을 빼앗기면 안 되는 군인의 기본 자세일 뿐이다. 특전사 훈련을 보면 우리가 발 뻗으며 잘 수 있는 이유를 대번에 안다. 군 복무를 하면 적개심도 키우지만 내 나라와 국민의 안전이 우선이라는 걸 수백 번 복창(復唱)한다. 계엄군이 국민들에게 총칼을 겨누었다는, 선(線) 넘는 억지는 없어야 한다. 1980년 광주의 트라우마는 군인들에게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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