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사태는 초현실적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믿기 힘들다. 하지만 이게 바로 우리 현실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갑자기 그 실체를 보여줬을 뿐이다. 이 사태의 핵심 의미는 대한민국이 갈림길에 섰다는 것이다.
1945년 이후 한국은 전인미답의 길을 걸어왔다. 미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올해 9월, 한국의 세계 국력 순위를 6위로 발표했다. 프랑스와 일본보다 위다. 위로는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독일뿐이다. 한국의 군사력은 세계 5위다. 명실상부하게 세계 강대국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지금 경제성장의 엔진이 꺼지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20년 간 5년마다 1%씩 성장률이 떨어진다.(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구조적 하락이다. 이대로 가면, 2030년대에는 성장률이 1%대로 떨어진다. 그런데 우리와 경쟁하는 중국은 2022년 과학기술에서 한국을 넘어섰다. 2023년부터 31년 만에 대중 무역적자가 났다. 일본화(Japanification)된 한국은 '잃어버린 30년'의 초입에 들어섰다.
이 수렁에서 벗어날 길은 기술 혁신, 노동과 생산시장 왜곡 같은 구조 개혁에 있다. 하지만 이걸 이끌어 가야 할 국가와 정치가 문제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의 한국 국력 평가를 보면, 수출(89.4점), 군사력(87.8점), 경제(83.8점)에 비해 리더십(22.1점), 정치(40.2점) 부문이 현격히 저조하다. 국가와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야말로 그 진상을 극명히 보여준 슬픈 소극(笑劇, Farce)이지 않은가.
지금 한국정치의 최대 문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다. 1987년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았다. 역대 어느 정부도 그 폐단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 불행을 비껴간 대통령도 없다. 정도가 심하지만, 12.3 비상계엄 사태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에 '제왕적 국회'가 새롭게 더해졌다. 22대 국회에서 절대 다수를 점한 더불어민주당은 방탄과 탄핵으로 사법부, 행정부를 마비시켰다. 입법독재에 가깝다. 12.3사태는 이런 국회와 대통령이 충돌해 빚어진 참극이다.
유혈 사태 없이, 비상계엄이 조속히 해제된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힘이다. 윤 대통령도 어떤 형태로든 조만간 물러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87년 체제의 구조적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레퍼토리가 다른, 제2, 제3의 12.3사태가 계속될 거라는 뜻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정치의 악령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만든 나라인가.
보수의 미래는 더 어둡다. 기나긴 겨울이 기다리고 있다. 또다시 탄핵되면 국민의힘은 소멸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뒤 문재인 정부는 1000명 이상을 수사하고 200명을 구속했다. 5명이 수사 중 자살했다. 탄핵 대선은 물론 지방선거, 총선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 나라의 근본이 흔들렸다. 한미동맹이 위기에 처하고, 김정은과 평화 타령을 하는 사이 북의 핵무장이 완성되었다. 탈북민이 강제 북송되고, 서해상에서 우리 국민이 살해돼도 정부는 침묵했다.
돌이켜보니, 12.3사태는 예견된 참사였다. 윤 대통령은 본래 "노무현 전 대통령 영화를 보고 2시간이나 울었다"는 골수 친노다. 적폐청산의 돌격대장이었다. 그를 대통령 후보로 영입한 건 순전히 대선 승리를 위한 고육책이었다. 하지만 취임 후 윤 대통령은 아내 문제를 비롯해 인사에서 공사를 못 가렸다.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와 엑스포 유치 때의 현실인식은 우주인 수준이었다. 고집불통인데다, 작은 충고에도 화부터 버럭 냈다. 지난 총선 대패를 자초한 후 국정운영은 총체적 난국에 처했다.
상황이 이럴진대, 범 보수 진영 차원의 대책이 세워져야 했다. 총선 후 잠깐 그런 각성이 일었지만, 곧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12.3사태가 터졌다. 지난 2016년 겨울 이후 그 참혹한 고통과 굴욕에도 불구하고, 보수 진영은 이렇게 나태하고 안일했다. 반대 정당에서 대선 후보를 빌려야 하는 불임정당이라면 집권 자격이 없다.
12.3 비상계엄 포고령에는 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새로운 국가이념을 정립하는 데 실패했다는 명백한 증좌다. 1980년대 의식에 머물러, 21세기 세계 6위의 강대국 대한민국을 이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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