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거대한 뿌리, 구미]<12> 항일 독립운동의 뿌리, 왕산 허위선생

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이 태어난 구미시 임은동 생가터. 현재 생가터는 기념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이 태어난 구미시 임은동 생가터. 현재 생가터는 기념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국권을 침탈당해

경상북도 구미시 왕산로 28-33. 아파트 숲에서 산길로 접어들면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이 보인다. 구미시민들이 즐겨 찾는 산책길인 금오산 자락이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려고 나선 선비이자 구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선생 생가 터에 구미시가 그의 의병활동과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9년 건립했다.

불과 100여년 전 이었다.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라 칭했지만 '제국'의 수명은 13년도 채 잇지 못했다. 19세기 후반 조선 국제정세를 전혀 읽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하다가 일본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하면서 자멸하다시피 나라를 빼앗겼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시대였다. 명성황후가 왕궁에서 시해되는 치욕스러운 '을미사변'도 발생했다.

조선의 대응이 오죽 답답했으면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조선책략>을 만들어 '친중(親中),연일(聯日), 결미(結美)'하고 러시아를 경계하라는 외교 전략을 조언했을까.1904년은 조선(대한제국)의 운명을 가른 격동의 시기였다.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을 벌이다가 일본과 러시아는 '러일전쟁'을 벌였다.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한 일본은 러일전쟁 와중에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했고 8월 '한일협약'을 맺고 고문정치를 시작했다. 다음해 '가쓰라-테프트' 협약을 통해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통감부를 설치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보내, 한일병합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국권이 침탈당하고 군대가 강제 해산 당하자 조선 팔도에서 의병(義兵)들이 일어났다. 을미사변 후 두 번째 의병봉기였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스러져가는 나라를 되찾겠다며 분연히 봉기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목숨을 건 무장투쟁이었다.

왕산 허위의 손녀가 그린 초상화.
왕산 허위의 손녀가 그린 초상화.

◆구한말 왕산 허위의 의병봉기

1904년 7월 1일자 <황성신문>에 '배일창의(排日倡義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킴)하자'는 통문이 前 평리원 판사 허위(許蔿) 등의 이름을 빌려 13道에 발송되었는데 이를 발견하면 소각해 버리라는 내부의 훈령이 나갔다"는 요지의 보도가 있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전번에 두 번이나 왕릉을 욕보였고 근래 을미사변으로 국모를 시해하여 우리의 원수가 되었으니 저들과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 없음은 어린아이와 부녀자도 모두 아는 사실이다.

저들은 최근 용암포사건으로 러시아인을 내쫓을 구실을 삼아서 의로운 깃발을 올린다고 하여 돌연히 출병해서 우리의 외부를 위협하고 <협약>(1904년 2월23일의 한일협정서)을 체결하였다....(중략)5월 그믐날 이시(7월12일)에 거사하면 종사가 다행하며 백성과 신하가 다행이다.광무8년 음력 5월5일 발문 평리원 판사 허위 "

허위가 격문을 돌린 의병봉기는 성사되지 못했다. 다만 7월 24일 서울 동대문 10리 밖에서 의병들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사라진 의병투쟁사건이 보도됐을 정도였다.구한말 봉기한 수많은 의병장 중에서도 '왕산 허위'(1855~1908)의 의병활동은 가히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큰 형 '허훈'이 청송 진보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허위는 고향 선산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해서 인근 지역 유생들과 함께 연합의병을 김천에서 결성, 무장투쟁을 벌였다. 을미의병이 실패하자 허위는 상경, 이조판서 등을 지낸 신기선의 천거로 1899년 환구단 참봉(參奉)을 시작으로, 1904년 평리원(平理院, 고등법원) 수반판사(首班判事), 의정부 참찬, 비서원승(秘書院丞)등을 역임하면서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허위는 '을사늑약'으로 조선통감부가 설치되고 병합작업이 본격화되자 항일무장투쟁에 다시 나서게 된다.

구한말 의병활동
구한말 의병활동

◆전국의병조직을 하나로 편성

지금의 왕산기념관이 있는 구미 임은동에서 4형제의 막내로 태어난 허위와 허훈, 허겸 등 형제들은 모두 의병활동에 나섰거나 한일합방 후에는 만주로 가서 무장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또한 허위의 사촌인 범산 허형의 딸 '허길'은 퇴계 이황의 13대손 진이가호와 일가를 이뤄 '이육사'(원록) 등 6형제의 독립운동을 이끄는 등 임은동 허씨 가문과 원촌 이씨 가문의 나라사랑은 청사(靑史)에 길이 빛났다.

'배일창의'(排日倡義), '일본을 몰아내고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킨다'는 기치아래 모인 창의군 군사장 허위. 고종의 비서원승(비서실장)까지 역임한 허위는 국권회복을 위해 '창의'를 호소하며 전국을 무대로 암약하면서 의병조직재건에 나섰다.

1907년 4월 실권을 모두 잃은 고종으로부터 창의하라는 밀서를 받은 허위는 7월 고종이 강제 폐위되고 8월1일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 해산령으로 무장해제되자 반발한 해산군인들이 각지에서 의병으로 봉기했다.

허위는 해산군인들을 재조직, 항일무장투쟁을 본격 결행하기로 하고 전국에서 군인들을 소집, 의병부대를 재편했다. 허위 등은 19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의병장회의를 소집, '13도창의대진소'를 편성하고 이인영을 총대장, 경상도 신돌석, 충청도 이강년, 경기·황해도 허위를 대장으로 임명하는 등 전국의병조직을 하나로 편성했다.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1월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등으로 재조직했다는 관련 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왕산기념관에 있는 허위선생의 흉상
왕산기념관에 있는 허위선생의 흉상

◆허위 선생의 고귀한 헌신, 대한민국의 뿌리

허위가 군사장으로서 총괄지휘한 13도창의군은 '서울(한양)진공작전'을 통해 일제통감부를 공격해서 일제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국권회복을 목표로 했다. 실제로 1908년 1월 15일 허위가 이끈 300여명의 창의군 선봉대가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도착, 후속부대의 합류를 기다리던 중 일군의 선제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후퇴했다. 전열을 정비하던 중 허위가 총지휘권을 위임받아 2차 진공작전을 펼치려 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2차 서울진공작전은 진행하지 못했다.

이에 허위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국권회복을 30여개 요구조건을 보낸 후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 증파와 토벌작전으로 2차작전은 성사되지 못했다. 1908년 6월 11일 일본 헌병대의 급습을 받고 체포된 허위는 7월7일 사형선고를 받고 1908년 10월 21일 순국했다.

의병장 허위 등의 수도권에서의 의병활동은 군대해산 후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통감부의 한일합병을 1910년 8월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3년 이상 늦추는 결과로 나타났다. 또한 서울 지척지간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함에 따라 나라를 잃은 백성들에게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고 이후 잔존 의병들과 유생들이 만주로 옮겨 독립군을 창건하는 등의 항일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온 가족이 의병활동과 독립투쟁을 전개하면서 이역만리에서 목숨을 잃는 등 명문가의 명맥이 끊어질 지경이 되었지만 왕산 허위 선생 일가의 고귀한 헌신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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