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미타카의 '양자 역학으로 본 우주'(2000, 김재영 옮김)에 따르면 우주는 작은 한 점에서 출발했다. 사람 크기의 100억분의 1인 원자, 그 원자보다 10만분의 1인 양성자, 그 양성자보다 천 경분의 1인 '기본 원소'는 상상하기도 힘든 작은 점이었다. 그곳엔 시간, 공간, 물질이 서로 구분도 안 됐다.
중력과 밀도가 거의 무한대인 기본 원소는 최소 200억 년 전에 '대폭발'(Big Bang)을 겪었고, 그로부터 시간은 200억 년 이상 흘렀고 지금도 흐르고 있다.
시간에 따라 공간도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여 관찰할 수 있는 우주 지평선은 대단히 넓다. 빛이 200억 년을 달려야 이쪽 끝에서 저쪽 끝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지평선 밖에 또 다른 은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니 실제 우주의 넓이는 알 수 없다. 이토록 넓은 우주는 지금도 계속 팽창하고 있다.
우주에는 긴 시간을 거치며 많은 물질이 생겨났다. 우주 지평선엔 1조 개의 은하가 있고, 각 은하에는 1조 개의 별들이 있으니 총 별의 수는 1조 개에 1조를 곱한 숫자이다. 이 우주 지평선 밖에 또 다른 은하가 있을 수 있다니 별의 총수는 1조 개에 1조를 곱한 숫자보다 많다. 그 별 중의 하나가 태양이며, 태양의 한 행성이 지구다. 지구가 태어나 40억 살이 되는 동안 각종 생명체가 생겨났고 그 한 갈래가 인간이다.
시간, 공간, 인간을 영어로는 타임(time), 스페이스(space), 그리고 휴먼(human)이라 부른다. 영어의 세 단어 간에는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한자어인 시간·공간·인간이라는 말에는 '사이 간'(間) 자가 공통으로 붙어 있다. 서로 연관성이 없는 서양의 세 단어와는 달리 동양의 세 단어에는 '시작'과 '관계'를 중시하는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다.
타임을 시(時)라 하지 않고 시간(時間)이라 한다. 영겁의 시(時) 중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다. 시간의 '시'는 시작점을, '간'은 종점까지의 간격을 나타낸다. 여기서 종점은 포함되지 않는다. 삶은 태어난 순간부터 종점인 죽음 직전까지의 〈시+간〉인 것이다.
스페이스를 공(空)이라 하지 않고 공간(空間)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광활한 공에서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며, '공'은 시작점을 '간'은 종점까지의 간격이고 여기서도 종점은 제외된다.
아파트 천장에 물이 새면 누가 책임지는가? 아파트의 각 층은 시작점인 바닥에서 천장까지로 보며 종점인 천장은 엄밀히 따지자면 윗집 소유이다. 그래서 윗집에서 책임진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철저히 〈공+간〉이다.
휴먼을 인(人)이라 하지 않고 인간(人間)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시작점인 나라는 '인'과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간의 '간', 즉 관계이다. 여기서도 관계의 종점인 타자들은 제외된다. 결국 누구나 자신과 주변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인+간〉인 것이다.
이렇게 시간·공간·인간을 정의했으니 이제 왜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뿐만 아니라 모든 물질이 시간과 공간의 굴레에 매여 있는지 생각해 보자. 그것은 본래 하나였기 때문이다. 태초의 기본 원소로 돌아가면 하나의 점이었고 그것이 폭발해서 광활한 우주에 흩어졌다. 그러나 물질들은 본래 하나였을 때의 시간 및 공간과의 인연, 그 운명의 끈에 여전히 묶여 있는 것이다.
팽창하는 우주가 언젠가는 팽창을 멈추고 축소될 것이다. 그러면 광활한 공간에 흩어진 물질들은 긴긴 시간 동안 다시 기본 원소로 돌아갈 것이다. 나도, 이순신 장군도, 세종대왕도 기본 원소에 수렴될 것이다. 기본 원소의 밀도와 중력이 임계점(臨界點)에 도달하면 대폭발은 다시 일어나고 시간·공간·물질로 구성된 새 우주가 탄생할 것이다.
이러한 시공간 속에 우리가 산다. 결국 사회는 관계의 망이다. 내가 〈인+간〉임을 망각하고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관계의 한쪽 끝인 너에게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관계망의 총체는 국가다. 지난 3일 밤의 비상계엄 후폭풍으로 나라가 요동치고 있다. 그러나 각자가 제자리를 굳게 지킨다면 이 시련 또한 지나가리라. 애국가 4절 앞부분이다.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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