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김우석] 탈피의 시간, 개헌의 시간

김우석 전 방송통신심의위원

김우석 전 방송통신심의위원
김우석 전 방송통신심의위원

필자는 1960년대에 태어났고,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1987년 '6·10 투쟁' 때 아스팔트에서 백골단과 맞섰고, 민주화 선언과 개헌도 현장에서 목도했다. 전형적인 '86세대'다. 그 후 공공 영역에서 일하며 87체제와 86세대의 민낯을 똑똑히 경험했다. '87체제'라는 갑옷으로 무장한 86세대는 20대에 권력을 알았고, 30대부터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거의 조선 후기 '세도정치' 수준이다.

초기에는 민주화를 앞당기는 역사적 역할을 충분히 했다. 그러나 그 공을 가릴 정도로 책임도 무겁다. 경제 규모가 그때와 비교도 안 되게 성장했고, 한류 문화는 세계를 뒤덮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대한민국 정치는 '3류'다. 그동안 민주화의 과실을 독차지하던 '86세대'의 책임이 적다 할 수 없다.

사람이나 사회 모두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피할 수 없다. 옛사람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유지·발전시키며 후손이라는 새로운 개체로 계승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유전공학의 발달로 전략이 수정됐다. 유전자 계승 대신 본인의 생명을 연장하는 방향이다. 하지만 아직도 한계가 분명하다. 건강한 세포에는 '헤이플릭 한계(Hayflick Limit)'라는 것이 존재한다.

인간 등 고등 유기체의 DNA는 일정한 횟수로 복제를 하고 사멸한다. 염색체 말단에 있는 텔로미어(Telomere)가 점점 짧아지며, 세포가 더 이상 분열하지 못하고 노화 또는 자멸사(apoptosis)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것을 막거나 느리게 하는 효소인 텔로머라아제(Telomerase)는 텔로미어를 복구하고 연장하지만, 이는 세포 돌연변이의 축적 가능성을 높여 암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이런 딜레마로 인간의 수명 연장은 한계에 직면해 있다. 그 와중에 출생률이 급격히 떨어지니, 자신의 유전자를 보전할 방법으로 정자·난자 냉동 열풍이 부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본인 개체보다는 새로 태어날 자손이 더 현실적인 대안인 셈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노병사(老病死)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으로 시스템을 보완해 왔다. 하지만 한계는 분명히 있다. 사고·병원균·돌연변이 등으로 각 분자들이 손상을 받아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면 시스템은 붕괴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 유일한 방법은 탈피(脫皮)를 하는 것이다.

갑각류 동물의 오래된 외골격은 유연성을 잃고 쉽게 부서질 수 있고, 포식자나 환경적 위험에 대한 방어력이 약화된다. 외골격이 손상되면 감염 위험이 커지고, 생존이 위협받는다. 탈피하지 못하는 갑각류는 결국 사망에 이른다.

'87체제'의 외피는 이미 그 소임을 다했다. 그때 대한민국의 몸집과 현재 몸집은 비교가 안 된다. 추구해야 할 지향도 달라졌고, 차별화된 병리 현상이 속출하고 있다. 이대로면 포식자(제국을 지향하는 강국들), 환경적 위험(관세 전쟁, 기후위기, 출생률 저하 등), 감염 위험(적성국에 대한 동조 등)에 의해 대한민국은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시스템 유지 보수를 위한 부분적 결함 수정(patching) 방식이 한계에 이른 것이다. 이제 근본적 해법을 위한 새로운 버전 개발(version upgrading)이 필요한 때다.

요즘 우리나라가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다. 국내 정치 리스크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사실(fact)이나 전제가 부족한 논리들이 각 정치 진영을 주도한다. 이제 국민이 주권자로서 용기를 내 역할과 책무를 감당해야 할 때다. 지금이 적기다. 과거 역사에서 보았듯, 정치권력이 약해지지 않으면 개헌은 불가능하다.

지난번 탄핵 사태로 우리는 '미봉(彌縫)의 역습'을 분명히 경험했다. 자해 정치, 정치 혼란의 악순환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 권력구조 등 상반된 이해관계로 논의 자체를 가로막아 온 구체적인 방안은 일단 뒤로하고, 개헌을 기정사실화하는 논의 기구를 만들도록 정치권에 압박을 가해야 한다.

국민투표 부의를 대통령(또는 권한대행)이 제안해 범정부 개헌준비위원회를 만들고, 국회가 참여하는 확대위원회에서 개헌안을 만드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이제 '탈피의 시간'이다. '개헌의 시간'을 또 놓쳐 다시 악순환과 통한을 남기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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