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문환의 세계사]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과 고대 로마 '누드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장례. 미켈란젤로 1500년-1501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예수 그리스도 장례. 미켈란젤로 1500년-1501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크리스마스가 눈앞이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경건해진다. 기독교 문화는 엄숙하다. 예수 그리스도 이미지도 근엄하다. 피 흘리는 십자가는 더욱 극적이다. 엄숙주의를 벗어난 알몸 예수 그리스도 표현이 가능할까? 누드 예수 그리스도 이미지를 찾아 역사여행을 떠나본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미켈란젤로의 「예수 그리스도 장례」 누드

역사여행자는 런던에서 미소를 머금는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이나 명화들이 즐비한 내셔널 갤러리가 무료다. 파리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처럼 비싼 입장료를 내며 오랜 시간 줄 서 기다리는 불편도 없다. 런던 트라팔가 광장 넬슨 동상으로 가보자. 트라팔가는 지브롤터 해협의 스페인 쪽 대서양 연안이다. 1805년 10월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물리치며 나폴레옹의 영국 침략 의지를 꺾은 장소다.

넬슨 동상에서 너른 광장을 가로지르면 네오 클래식 양식의 장엄한 내셔널 갤러리가 맞아준다.9번 전시실로 발길을 옮긴다.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르네상스의 주역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작품들이 기다린다. 미켈란젤로의 1500년~1501년 작 「예수 그리스도 장례」가 눈에 들어온다.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려 매장하는 순간을 담았다.

왼쪽에 막달라 마리아가 앉았고, 오른쪽에 성모 마리아가 서 있다. 칠이 덜 된 미완성 작품이다. 시선을 확 끄는 대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체다. 가운데 살짝 가려진 남성 상징의 일부가 보인다. 중세 예수 그리스도의 남성 노출은 상상할 수 없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도서관에서 그리스 로마 문명을 공부하며 르네상스를 꽃피운 25살 청년 미켈란젤로의 발칙하면서도 위대한 작품 철학이 빚은 결과다. 신을 나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 1541년.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바티칸 정원 전시 사진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 1541년.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바티칸 정원 전시 사진

◆교황청 「최후의 심판」 예수 그리스도 누드

이탈리아 로마의 바티칸 시티로 가서 그런 추론에 힘을 실어보자. 가톨릭의 구심점인 교황청 시스티나 예배당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2점의 대작으로 이름 높다. 1512년 완성한 천장화 「천지창조」와 1541년 완성한 벽화 「최후의 심판」이다. 「천지창조」는 가로 41.2m, 세로13.2m의 대작이다. 여기 등장하는 야훼 하느님은 옷을 입었다. 여기까지는 중세의 모습이다.

「천지창조」 아래 설교단 쪽 벽면의 「최후의 심판」으로 시선을 돌린다. 1534년 피렌체와 결별하고 로마로 온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이듬해 1535년 새 교황 바오로 3세가 벽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한다. 미켈란젤로는 환갑, 60살의 고령에 혼자 작업에 들어가 6년 후인 1541년 완공시킨다. 세로 13.7m, 가로 12.2m의 「최후의 심판」이다.

천국에 오르거나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크게 회전하는 형태의 구도다. 391명의 군상 포즈도 제각각이다. 장엄하고 역동적인 구도는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양식의 개막을 알린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인물은 100% 누드다. 현재 그림은 알몸이 아닌데, 이게 무슨 말인가?

◆미켈란젤로 사후, 누드 예수 그리스도에 옷 입혀

원작은 다르다. 미켈란젤로는 예수와 마리아도 나체로 그렸다. 궁금하다. 미켈란젤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성모 마리아도 나체지만, 팔과 다리로 상하체 상징을 가리는 포즈여서 그곳을 볼 수는 없다. 「최후의 심판」은 1564년 미켈란젤로가 89살로 죽은 이듬해 새 운명을 맞는다.

미켈란젤로가 죽기 1년 전 1563년 종료된 트리엔트 공의회는 나체 표현 같은 종교적으로 부도덕하게 비칠 수 있는 작품에 비판을 가했다. 미켈란젤로 작품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미켈란젤로 생전에 손을 못댔다. 미켈란젤로가 죽자 1565년 교황 비오 4세의 명령이 떨어졌다. 개작은 미켈란젤로의 제자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맡았다.

1497년 누드 디오니소스(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 소장)를 조각하고, 1504년 피렌체 공화국 청사에 다비드 누드(피렌체 아카데미아 갤러리 소장)를 세운 미켈란젤로가 지하에서 어떻게 생각할까?

예수 그리스도 세례. 상아 조각. 500년경 제작. 대영박물관
예수 그리스도 세례. 상아 조각. 500년경 제작. 대영박물관

◆대영박물관 500년 예수 그리스도 누드 세례

미켈란젤로가 고대 그리스 로마의 누드 예술을 계승했다면, 313년 기독교 공인 이후 제작된 로마 시대 예수 그리스도 누드 작품을 찾아 런던 대영박물관으로 다시 가보자. 500년경 제작된 「예수 그리스도 세례」 상아 조각이 예수 그리스도 이미지의 새로운 면모를 선보인다. 로마식 토가를 입은 세례 요한이 오른손을 예수의 머리에 대고 세례 의식을 진행 중이다.

요단강 물속 예수 그리스도는? 알몸. 남성 상징이 보인다. 하지만, 밋밋하다. 단색 조각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누드를 묘사한 화려한 채색 작품도 있을까? 동로마 제국 황제들이 내린 1차(726년), 2차(814년) 성상(聖像) 금지령으로 기독교 초기 예수 그리스도 묘사 작품들이 파괴됐지만, 일부 남았다.

예수 그리스도 세례 모자이크. 493년. 이탈리아 라벤나 아리우스파 세례당
예수 그리스도 세례 모자이크. 493년. 이탈리아 라벤나 아리우스파 세례당

◆라벤나 493년 동고트족 아리우스파 세례당 누드 예수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수도이던 이탈리아 북동부 라벤나로 가보자. 393년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95년 죽으면서 로마제국을 둘로 가른다.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중심의 동로마는 큰아들 아르카디우스, 밀라노 중심의 서로마는 작은아들 호노리우스에게 물려준다. 흔히 서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로마제국은 이미 286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수도를 로마에서 밀라노로 옮겼다.

호노리우스 황제는 게르만족 일파 서고트족의 침략이 격화되자, 즉위 7년 뒤 402년 수도를 방어에 좋은 아드리아 해안가 늪지 도시 라벤나로 옮긴다. 기마 유목 민족은 해전에 취약하다. 늪지 도시 베네치아도 비슷한 탄생배경을 갖는다. 476년 게르만족 오도아케르(스키리족과 흉노족 혼혈 추정)가 라벤나를 정복하며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다.

하지만, 12년 뒤, 488년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동고트족 왕 테오도릭이 라벤나를 침략해 오도아케르를 죽이고 493년 라벤나에 동고트 왕국을 세운다. 동고트족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도였다.

테오도릭이 493년 라벤나에 건축한 아리우스파 세례당 천장에 「예수 그리스도 세례」 모자이크가 1500년 세월을 넘어 영롱한 빛을 발한다. 요단강물에 예수 그리스도가 서 있다. 오른쪽 강둑에 세례 요한이 오른손을 들어 예수에게 세례를 행한다. 강물 왼쪽에 요단강의 신이 세례 의식을 바라보는 구도다. 앳된 얼굴의 예수 그리스도 모습을 자세히 뜯어보자. 푸른 강물에 잠긴 하체. 물속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남성 상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 세례 모자이크. 451년. 이탈리아 라벤나 네온 세례당
예수 그리스도 세례 모자이크. 451년. 이탈리아 라벤나 네온 세례당

◆라벤나 451년 서로마제국 네온 세례당 누드 예수

동고트족 아리우스파의 예수 그리스도 누드 세례 모자이크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아리우스파 세례당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네온 세례당이 자리한다. 451년 건축됐으니, 발렌티아누스 3세 황제시기다. 발렌티아누스 3세는 전임 호노리우스 황제의 조카다. 호노리우스의 여동생이자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딸 갈라 플라키디아의 아들이다. 이 시기 기독교 예술이 화려하게 꽃폈다. 이때 만든 네온 세례당 천장을 보자. 요단강에서 세례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알몸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동고트족 아리우스파 세례당 그림과 판박이다.

대영박물관의 500년 조각, 493년 동고트족 아리우스파 세례당과 451년 서로마 제국 네온 세례당 모자이크의 공통점은 알몸으로 세례받는 예수 그리스도다. 기독교 초기 예수 그리스도 표현은 중세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엄숙한 분위기의 예수 그리스도 묘사와 사뭇 달랐다.

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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