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취재현장] 비상계엄이 소환한 것

구민수 경제부 기자

구민수 경제부 기자
구민수 경제부 기자

날벼락 같은 비상계엄이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이제 태어난 지 16개월이 지난 딸을 재우고 운동하러 나서는 길에 대한민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담화를 들었다. 비상계엄에 대해 검색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늠했다. 운동기구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유튜브 등 각종 SNS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피를 토하는 심정이라던 대통령은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곧이어 경찰이 국회 출입을 막았다는 소식과 국회에 군부대가 투입되는 장면이 삽시간에 퍼졌다. 계엄령 해제를 위해 국회의원들이 속속 도착하고 분노한 시민들도 여의도로 모여들었다. 평온했던 대한민국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40년 전 군사독재 시절로 회귀한 것이다.

기자를 포함한 언론계 종사자에게 비상계엄은 구체적인 위협이 됐다. 계엄사령부는 포고령 1호를 통해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고 발표했다. 비상계엄이 발표된 다음 날부터 계엄사가 파견한 검열관들이 언론사에 들이닥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파견된 검열관은 기사를 검열하고 정부에 불리하거나 비판적인 기사는 삭제했을 것이다. 회사로 쳐들어오는 군인들과 기자들이 충돌했을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동료들이 연행, 구금, 형사 처벌 등 '처단'됐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처단이란 말은 사전에만 있는 줄 알았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감히 시민들을 향해 처단한다는 말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집에 와서는 잠이 든 딸을 붙잡고 부디 아무 일도 없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1989년생 아빠와 2023년생 딸이 비상계엄을 동시에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고 불안했다. 국회 상황을 지켜보는 가운데 문재인 전 대통령이 군은 국민에게 맞서는 잘못을 다시는 범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SNS로 전했다. 전임 대통령의 당부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군이 반헌법적인 계엄 선포에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현장에 투입된 군인들이 임무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은 12·3 비상계엄 시도가 실패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경찰도 잠시 동안 국회 출입을 허용해 많은 국회의원들이 본회의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아선 시민들의 용기와 지휘부의 작전이 치밀하지 못했다는 요인도 있지만 지시와 명령을 수행할 군과 경찰 개개인이 느끼는 도덕성과 직업윤리도 사실상의 태업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반면 비상계엄으로 전 국민을 두려움과 공포로 얼어붙게 한 대통령은 "도대체 2시간짜리 내란이 있습니까"라고 큰소리를 치고 "질서 유지를 위해 소수의 병력을 잠시 투입한 것"이라며 사건의 성격을 축소하기에 급급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저지른 실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것은 시민들의 의식 속에 각인된 역사적 트라우마를 간과했다는 점이다. 12·12 군사 반란이 5·18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 대한민국의 슬픈 근현대사는 그날 우리를 몹시 두렵게 만들었다.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제안 설명에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느냐'는 소설가 한강의 질문을 언급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 희생자들의 무덤 위에서 아주 운이 좋게도 살아남았다. 한강의 말처럼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 것이다. 이제 만 1세가 된 딸에게 더 이상의 비상계엄이 없길 바란다. 어른들이, 산 자들이 나설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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