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12월만 되면 가로수들도 '별빛'을 피워 문다. 쓰나미처럼 밀려 드는 은하수 실전구들, 이놈들이 크리스마스와 맞물린 송구영신 축제를 설렘 가득하게 칠해준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앞산 빨래터 해넘이공원도 크리스마스 핫플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베이커리카페들도 온갖 캐럴을 띄워 보내면서 송구영신 특수사냥에 나섰다. 특히 대명중학교 근처 레스토랑 '앞산주택' 정원에 색소폰을 부는 이색 산타크로스 캐릭터 인형이 포토존으로 인기다. 지난 일요일 나도 여기서 한 컷 찍었다.
나는 1년 전, 승용차를 버렸다. 자전거로 웬만한 거리를 이동한다. 골목에 핀 온갖 색깔의 카페를 스캐닝할 수 있어 좋다. 커피와 빵의 도시답게 수천개에 달하는 카페들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밋밋하다. 주인의 체취는 숨어버리고 알바 직원들의 획일화 된 멘트만 유빙처럼 떠돈다. 그리고 비슷한 인테리어. 호흡만 있지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빈티지 카페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대구 토종 커피명가와 핸즈커피는 예외적이다. 레벨이 다른 프랜차이즈인 탓이다. 경산 압량읍 벌판에 들어선 커피명가 경산 본점은 하나의 문화랄 수밖에 없다. 복합문화공간을 겸한 여행지 같은 포스다.
◆명장 같은 커피장이들
'그래도 여기다' 싶은 몇 곳이 있다. 다들 꼬릿한 질감이 감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문태갑 전 서울신문사 사장이 기거했던 화원 본리리 남평문씨 세거지 옆 '작가와 커피', 그리고 왜관역 바로 옆에 잡초처럼 피어있는 '하루역', 아양교 옆 금호강변 이슥한 곳에 있는 '야노쉬', 그리고 남산동에 비밀 아지트 같은 스페셜티커피를 팔고 있는 '이병규 커피클럽', 방천시장 안 재즈카페 나발과 연동된 '로스터리', 지역 추억의 다방 대명사인 시내 진골목 내 '미도다방' , 김천과 상주에 각각 두 곳이 있다. 김천 추풍령 발치에 있는 '시남'(詩男)과 감문면 '간판없는 커피집', 옛 상주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는 '버스정류장' , 상주시내 '커피가게' 등이다. 다들 '지방문화재'라 해도 손색이 없다.
'작가와 커피' 주인장, 임종은 버려진 물건에 생명을 불어넣는 정크아티스트 겸 촌철살인 카피라이터. 가게 앞에 '사는 게 꽃 같네'란 패러디 문구를 걸어놓았다. 많은 이들을 빙그레 웃게 만든다. 문희갑 전 대구시장도 단골이다.
하루역장 방극만. 아는 사람만 아는 빈티지 커피숍의 성지 같은 곳이다. 광주시립교향악단의 오보에 주자였던 그는 2000년에는 크로스오버 앙상블 '허브'를 통해 포엠콘서트, 태교음악회 등을 기획했다. 2006년에는 <사>문화터미날을 만든다. 광주 지역의 첫 예술가를 위한 사회적기업이었다. 우연히 광주비엔날레를 보러온 포항 출신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새로운 삶을 위해 전라도를 등지고 경상도로 온다. 2011년 왜관역에서 한 공간을 찜한다. 무려 17번이나 주인이 바뀐 공간이었다. 메뉴판이 우습다. 미국을 싫어하는 듯 아메리카노도 'america NO'라 적어놓았다. 에스프레소는 '독한놈', 아메리카노는 '순한놈', 카페라테는 '부드러운놈', 마키아토는 '달달한놈', 카페모카는 '복잡한놈', 더치커피는 '천사의눈물', 가격대도 좋은놈·더좋은놈·무지좋은놈으로 분류해 놓았다.
야노쉬의 주인 손영철은 봉쇄수도원 수사 같다. 도무지 말이 없다. 그레고리안 찬트의 선율 같다. 첼로에 미친 이 사내는 강변에 핀 야생화의 잎을 말려 빛바랜 시집 위에 살포시 뿌려놓고, 그날에 맞는 강변 풀꽃을 병에 꽂아둔다. 자리라 해봐야 두 꼭지. 실내 한 개 밖에 한 개. 금호강물 소리가 들리는 여기에서 나는 마임이스트 조성진과 함께 셋이서 비정기적으로 즉석 공연을 벌이기도 한다.
시남은 '시쓰는 남자'의 준말. 김 시인은 2010년 봉산리 신암리에 문을 열었다. '시남=신암'. 우연의 일치였다. 2012년 등단했고 아내는 화가인데 생계를 위해 미용실을 꾸려간다. 종일 아내를 기다리면서 시적 울림이 감도는 커피를 태워주면서 빈둥빈둥. 하지만 매의 눈매로 살아간다. 그의 시편이 곳곳에 불어 있고 아내의 그림이 그 옆을 서성거린다.
영주 출신 박휘재는 별별 직업 다 섭렵한 뒤 죽는 심정으로 간판없는 커피집을 열었다. '커피 지식 제로' 상태였다. 시행착오가 스승이었다. 국내 첫 뻥튀기로스팅을 시도했다. 명물 커피는 '사약커피'. 이 단어 때문에 노이즈마케팅에 성공한 것 같다. 네 가지 맛이 있다. 꼬순‧시큼한‧묵직한‧지옥의 맛. 커피잔 대신 한때 국밥집 운영할 때 사용하던 놋그릇에 커피를 담아준다.
커피클럽 문지기인 이병규. 커피값도 엄청 세면서도 도무지 돈 버는 일은 대충이다. 영업전략인가? 아무튼, 두문불출, 그리고 은인자중하는 이 공간. 동네분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 방문하는 손님들도 범상치 않고 특히 주인장의 외모가 각별한 탓이리라. 아주 유쾌하고 패셔너블하다. 배려 깊은 매너도 한몫한다. 고가의 커피, 게이샤는 2008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입찰에 참여하고 있다. 1인분에 맞는 10g의 콩, 그걸 갈고 드립 해 150㏄를 추출한다. 건축가인 그는 과외로 커피세계 탐험에 나선다. 일본을 100회 이상 들락거리며 커피의 화학적 물성의 세계를 공부했다. 원본의 커피 맛. 그게 그의 화두이다.
저렇게 무뚝뚝할 수 있을까 싶은 로스터리 대표 이선기. 그는 대구 재즈카페 리더격으로 숱하게 말아먹다가 아직 포기하지 않고 '나발'로 버티고 있다. 적자는 커피콩 볶아 보충한다. 요즘 나발은 재즈에서 좀 벗어나 어쿠스틱라이브 카페로 쾌속항진 중이다. 전국구 괴물 기타쟁이를 무대에 다 세우고 싶어한다. 그걸 보면서 그는 옆방 로스팅룸에서 종일 길양이와 놀면서 커피콩을 볶고 있다. 예의 이들은 가격보다 '가치'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유쾌발랄 커피 이면사
다 알만한 커피 연대기를 권말부록으로 내밀어 본다. 에티오피아의 약(藥)으로 출발한 커피. 현재는 석유 다음으로 교역량이 많은 세계 최강 기호식품으로 등극했다. 한국 커피사에서 1866년은 참 특별난 시기다. 공교롭게도 그 해에 프랑스군이 병인양요, 미군이 신미양요를 저지른다. 참전한 1천230여 명의 미군에겐 남북전쟁 때 크게 대중화되기 시작한 '카우보이 커피'가 전투식량으로 지급됐다. 이 커피는 '플란넬'로 만든 주머니에 가루를 넣고 끓이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이렇게 하면 물에 녹지 않는 커피 찌꺼기가 치아에 달라붙는 걸 막을 수 있었다.
고종이 '정관헌'에서 한국 최초 커피 마니아로 등극한 이야기는 이제 상식이 됐다. 한국 커피문화의 첫 교두보는 미군 아닐까. 1945년 9월 8일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 24군단 소속 제7보병사단이 인천에 상륙했다. 이어 한 달 새 부산과 목포를 통해 각각 제40사단과 제16사단이 들어왔다. 당시 38선 이남에 주둔한 미군 병력은 약 7만 명. 이들 미군에게는 세 종류의 배급식량이 주어졌다. 커피는 'C레이션(Ration)'의 한 품목. 'C'는 요리할 필요 없이 바로 꺼내 먹는 유형으로 복숭아잼, 비스킷, 액체우유, 설탕, 커피, 껌 등으로 구성됐다. A레이션은 요리가 필요한 생재료 꾸러미, B레이션은 반쯤 요리된 것이다.
인스턴트커피 세계화의 선두자는 '네슬레'. 대공항기 남아도는 브라질 커피를 헐값에 구매해 인스턴트커피를 만들어 창고를 가득 채울 때쯤인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6년간의 긴 전쟁, 미군에게 보급되는 커피는 네슬레가 독점했다. 네슬레는 돈방석에 앉는다.
60년대까지 한국엔 커피가 존재할 수 없는 국면. 커피가 수입금지 품목인 탓이다. 커피를 맛보려면 권력층이 되든지 아니면 미군부대 PX 관계자와 연이 닿아야만 했다.
1967년 보건사회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는 3천600여 다방이 성업 중이었다. 이들 다방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음료는 단연 커피였다. 1968년 커피가 제한 승인품목으로 바뀌었으나 관세가 높아 호텔 등 특별한 공간에서만 유통됐다. 서민과의 거리가 멀었다. 커피가 그야말로 숭늉 대신으로 마시는 보편 음료가 된 것은 1970년부터. 동서식품은 1970년 국내 최초로 '멕스웰하우스'란 인스턴트커피 생산에 성공, 커피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하지만 68년 동서와 함께 등장한 미주산업이 유통시킨 드럼통커피 'MJC'는 동서보다 더 신임을 얻는다. 메이저가 미주, 동서는 마이너 취급. 물론 7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한국 다방커피문화는 결국 동서식품와 미주산업이 주도한 것이다. 하지만 미주는 사라지고 82년 맥심까지 추가시킨 동서가 한국 커피시장의 대명사로 군림하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기술개발팀이 대구의 여러 다방의 '달달커피'의 함량을 분석했고 그걸 토대로 제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대구의 다방커피는 한국의 입맛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8년 커피자판기 1천100대가 전국 주요 공공장소에 설치된다. 1979년 서울 대학로 샘터사 건물에 전국 첫 체인커피격인 '난다랑'이 문을 연다. 여긴 다방이 아니라 커피숍이었다. 난다랑은 대구에도 진출한다. 1987년 커피 수입자유화로 원두수입 본격화된다. 1988년 12월 서울 압구정파출소 앞에 문을 연 '자뎅'을 시작으로 마침내 국내에서도 원두커피 전문점 시대가 열리고 99년 스타벅스가 이대 앞에 진을 친다. 대구 커피 이야기는 다음에 펴볼 예정이다. 아무튼 아듀 2024년!
jeb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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