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조향래] 일그러진 영웅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서울에서 모범생이었던 한병태는 아버지의 전근(轉勤)에 따라 시골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5학년 2반에 배치된 그는 초라하게 보이는 반 아이들에게 은근히 우쭐거리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곧 반장인 엄석대가 싸움도 공부도 최고인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선생님들도 칭찬 일색이었다.

한병태는 반장 선거까지 좌지우지하는 불평등한 학급 질서를 타파하려 했지만 엄석대의 위력과 회유(懷柔), 교활함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갈수록 자신만 왕따가 될 뿐이었다. 최후의 수단인 공부로 반장을 제압하려 했으나 그 또한 역부족이었다. 결국 엄석대의 권위에 굴복하고 반장의 비호(庇護) 아래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지고 말았다. 그러나 엄석대의 성적이 조작된 것을 알고 반전의 기회를 노렸다.

새 학년이 되면서 부임한 유능한 담임선생이 엄석대의 실상을 파악하고 시험지 바꿔 쓰기에 대한 엄벌을 내렸다. 선생님이 무기력한 반 학생들을 질타하며 모두가 똑같은 친구임을 강조하자, 그제서야 너도나도 반장의 비행을 앞다투어 고발했다. 이 시점에서 한병태는 오히려 침묵했다. 최악의 상황을 견디지 못한 반장 엄석대는 학교에 불을 지르고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1987년 발표한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베스트셀러로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 소설의 배경인 시골 초등학교 교실은 곧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일그러진 권력의 부조리한 실상과 부당한 독재에 편승(便乘)하거나 순응하고 묵인하는 행태, 그리고 막상 무너진 권력에는 돌을 던지는 비열한 성향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굴곡진 우리 정치사는 엄석대의 손아귀에 놀아나던 '5학년 2반'보다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지금 정치판에서 '엄석대'는 정녕 누구일까. 제대로 일그러진 영웅이 누구인지, 격랑에 휩쓸린 우리 사회는 그것을 가려낼 역량이 있을까. 더 사악한 엄석대가 군림할 또 다른 '5학년 2반'의 출현을 예방할 집단 지성을 갖추고 있을까. 소설은 세월이 흘러 범죄인이 된 엄석대의 체포 현장을 그렸지만, 영화는 엄석대의 성공과 부활을 암시하는 결말로 각색(脚色)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다시 기로에 선 한국 사회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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