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 범위를 확대하는 것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국내 고용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계는 기업 비용 부담 증대로 가뜩이나 어려운 경영 환경이 악화될 것이란 우려가 높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탄핵정국 장기화로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가운데 이번 판결이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 통상임금 판단 기준 '고정성' 요건 폐지
재직 여부, 특정 일수 이상 근무 조건을 기준으로 지급되는 조건부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은 '고정성'은 합당한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지난 1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한화생명보험과 현대자동차 전·현직 근로자가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청구 소송의 상고심을 선고하면서 고정성을 통상임금의 요건으로 볼 아무런 근거가 없다며 해당 기준을 폐기하는 것으로 판시했다.
대법원은 "근로자가 소정 근로를 온전하게 제공하면 그 대가로서 정기적, 일률적으로 지급하도록 정해진 임금은 그에 부가된 조건의 존부나 성취 가능성과 관계없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앞서 두 회사가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배제한 근거는 2013년 12월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었다. 당시 대법원은 통상임금의 판단 기준으로 정기성, 일률성, 고정성을 제시했다. 고정성이란 '소정 근로를 제공하면 추가적인 조건의 충족 여부와 관계없이 당연히 지급될 것이 예정되며 지급 여부나 지급액이 사전에 확정돼야 한다'는 조건을 뜻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고정성은 통상임금에 관한 정의 규정인 근로기준법 시행령 6조 제1항을 비롯한 법령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며 "법령상 근거 없이 고정성을 통상임금의 개념적 징표로 요구하는 것은 통상임금의 범위를 부당하게 축소시킨다"며 사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에 대해 대구의 한 자동차부품사 대표는 "이미 임금수준이 많이 오른 상황에 이 같은 판결이 나오면서 당황스럽다. 고금리, 고물가로 어려움이 큰데 임금까지 급격히 오르게될까 걱정"이라고 했다.
◆ 실질적 혜택 제한적 "기업 부담만 가중"
이번 판결로 기업들의 부담이 가중될 것이란 우려가 높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 따르면 조건부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산입될 경우 우리나라 기업 26.7%가 영향을 받는다. 추가 인건비로 연간 6조7천889억원의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된다. 통상임금에 근거해 지급해야 하는 연장, 야간, 휴일근로 수당, 연차 수당 등이 한 번에 오르기 때문이다.
대구지역 산업계가 겪는 부담도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대구상공회의소가 분야별 경영애로 체감 수준을 조사한 결과 최저임금을 포함한 '노동 분야' 체감 수준이 6.2로 가장 심각한 것으로 조사됐다.
염색산업단지 입주기업 관계자는 "앞으로 상황을 지켜봐야겠지만 임금 부담이 커지면 공장을 가동하는데 최소한의 인력만 투입하거나 물량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근로자들이 임금 손실을 입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2017년 통상임금 소송에서 패소한 모 대기업은 연장근로 수당을 큰 폭으로 인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주말 및 시간 외 근무 등을 전면 취소하면서 실질적인 임금이 줄어드는 일도 있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를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경총 연구조사에 따르면 300인 이상 사업장의 근로자 중 재직자 조건부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산입될 시 임금 총액이 증가하는 근로자의 경우 평균 월 30만1천원, 연간 361만6천원의 임금 총액 증가가 예상된다. 반면 29인 이하 사업장의 경우에는 임금 총액 증가분은 월 1만7천원, 연간 20만8천원에 그칠 것으로 예측된다.
이에 대해 강석구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은 "산업현장의 혼란이 우려된다"며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이 더욱 커질 것이고, 대내외 불확실한 경영 여건과 맞물려 우리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연공 서열 중심의 우리나라 임금체계를 직무급으로 바꾸는 근본적인 개선방안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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