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조향래] 정쟁과 국란(國亂)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어설픈 극본과 무능한 연출 때문에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막을 내리긴 했지만,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이 시사한 역사적 교훈은 컸다. 영명한 군주와 영용한 장수 그리고 귀족과 신하와 백성이 함께 절체절명의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극복하는 영웅적인 서사를 그린 것이다. 고려가 불가능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동아시아의 당당한 주권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국론 통일과 민심 합일의 결과였다.

조선 선조수정실록은 임진왜란을 초래한 가장 큰 이유로 '분당(分黨)'을 꼽았다. 당시 조정은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비롯된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여파로 동인과 서인의 축출과 환국(換局)이 거듭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을 다녀온 동인과 서인의 의견도 엇갈렸다.

병자호란 전의 조정은 문묘 종사(文廟從祀) 논쟁에 휩싸여 있었다. 공자(孔子) 사당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제사를 올리는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했다. 성균관과 유림도 둘로 갈라져 상소와 시위가 잇따랐다. 청 태종의 침입으로 한양이 함락되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정은 다시 척화(斥和)와 주화(主和) 논쟁을 벌였다. 결과는 항복이었고, 수십만 명의 백성이 만주로 끌려갔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공격을 부른 것도 정쟁(政爭) 탓이었다. 비리 의혹이 노출된 네타냐후 총리의 '사법개혁' 추진으로 국론이 좌우로 갈라지고 시위가 확산되었으며, 총리와 국방장관이 충돌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정치권은 정치적 내전에 매몰되었고 정부와 위정자들은 하마스의 공격을 눈치채지 못했다. 피격 직후에도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전 경험과 첨단 장비를 지닌 강한 군사력에다 여성 징병제를 실시하는 민족 총화(總和)의 나라 이스라엘조차 내부의 정치적 갈등이 국란(國亂)의 화근이었다.

오늘 우리의 정치적 상황은 더 참담하다. 비상계엄과 탄핵의 정국에서 미국은 '북한이 도발할 경우 군 통수권을 누가 행사할 것인지' 묻고 있다. 야당은 한덕수 대통령 직무대행에게도 수시로 탄핵 협박을 하고 있다. 국가를 생각하는 정치가보다는 당파를 앞세우는 정치꾼이 득실거리는 혼돈의 시절에 '분열된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링컨 대통령의 명언이 폐부를 찌른다.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joen04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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