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덕일의 우리 역사 되찾기] 역사왜곡 청산하고 광명의 빛을

일제가 왜곡한 역사 바로잡을 기회, 친일파 득세로 무산

◆우리 학계라는 용어

전 세계 역사학자들 중에서 한국 역사학자들만 쓰는 용어가 있다. '우리 학계' 또는 '학계'라는 표현이다. 먼저 한국 역사학자들이 '학계'라는 용어를 쓸 때는 이들이 특정사안으로 구석에 몰렸을 때이다.

문재인 정권이 가야사 복원을 주요 국정과제로 밀어붙이며 천문학적 국고슬 쏟아붙자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이른바 '학계'와 손잡고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했다. 그런데 그 논리에 일본 극우세력의 한국 재점령 논리인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역사시민운동가들이 반발했다. 즉 경남 합천의 옥전고분군을 '다라국', 전북 남원의 유곡리·두락리 고분군을 '기문국' 고분이라고 적시했는데 '다라'와 '기문'은 일본 극우파들의 성서인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임나일본부' 지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물의가 일었던 것이다.

그러자 한국고고학회, 한국고대사학회, 한국상고사학회, 한국역사연구회, 고고학·역사협의회 등에서 2022년 1월 문화재 청장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는데, 여기에 "정치인과 중앙·지방정부는 학계의 성과를 면밀히 살펴 의견을 경청하고, 각종 정책을 정상적으로 집행하라"라고 요구했다. 이들이 말하는 학계의 성과라는 것은 경남 합천은 야마토왜가 지배한 '다라국' 땅이라는 것이고, 전북 남원 또한 야마토왜가 지배하던 '기문국'이라는 논리다.

전 세계에서 학계라는 모호한 집단명칭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집단은 한국 역사학자들이 유일하다. 이들이 말하는 학계가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식민사학계를 뜻한다는 것은 이제 전국의 많은 역사시민운동가들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건재하다. 전국 각 대학의 역사학과와 국고로 운영되는 역사관련 국책 기관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뿌리가 너무 깊고 넓어서 뿌리뽑기가 쉽지 않다.

◆만주를 삭제한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역대 한국사교과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인물이 한백겸(1552~1615)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여 2002년부터 사용하던 국정 '국사교과서'(고등학교)는 실학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문화운동은 이수광, 한백겸 등에 의하여 제기되었다…한백겸은 동국지리지를 서술하여 우리나라의 역사지리를 치밀하게 고증하였다(302쪽)"라고 썼다.

'이수광과 한백겸'이 마치 실학의 선구자인 것처럼 강변하고 있지만 한백겸은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를 대단한 저서인 것처럼 극찬했지만 이는 불과 120여쪽 정도의 소책자에 불과하다. '국사교과서'에서 '동국지리지'를 극찬하는 이유는 고대부터 우리 역사 강역이었던 만주 역사를 대부분 삭제하고 한반도 내로 축소시킴으로써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삼한에 대해서 살펴보자. 삼한에 대한 중국 사료는 진수(陳壽·233~279)가 쓴 '삼국지(三國志)'의 '오환·선비·동이열전'이 대표적인데, 진수보다 150여년 후의 인물인 범엽(范曄·398~445)이 쓴 '후한서(後漢書)'에도 '동이열전'에도 삼한이 나온다.

한백겸은 진수의 '삼국지'는 인용도 하지 않고 '후한서'만 가지고 삼한에 대해서 썼는데, 삼한의 강역을 한반도 남부로 크게 축소시켰다. '삼국지'는 물론 한백겸이 인용한 '후한서'도 삼한은 "사방 4천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1천리를 지금의 360Km 정도로 환산하면 사방 4천리는 지금의 1천440Km 정도가 된다. 그런데 한백겸은 '사방 4천리'라는 원문은 쏙 빼버리고 그 1/3도 채 되지 않는 경기남부와 충청·전라·경상·충청도에 삼한을 쑤셔 넣었다.

그런데 신라말의 최치원(857~?)은 '삼국사기'의 '지리지 신라'조에서 "마한은 고구려이고, 변한은 백제이고,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말했고, 이에 대해 김부식(1075~1151)을 비롯한 고려 사관들도 "(최치원의)이런 설들이 사실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동의했다. 삼한은 고구려를 포함해야 사방 4천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백겸은 "최치원이 마한은 고구려이고, 변한은 백제라고 했는데, 이것은 오류이다"라고 비판하면서 "고구려는 백제이고, 변한은 가야이고,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삼한을 한반도 남부로 축소했다. 한백겸보다 700여 년 전의 국제적 지식인인 최치원과 한백겸보다 500여 년 전의 고려 사관 김부식 등의 주장을 아무런 근거 사료없이 부정한 것이다. 한백겸의 우리 강역사 축소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큰 환호를 받았고, 아직도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영원한 우리의 스승이시다"를 도그마로 삼는 이 땅의 역사학자들이 "우리나라의 역사지리를 치밀하게 고증"한 '위대한 실학자'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정약용 '강역고'의 한계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사회개혁적 측면에서는 높이 살 수 있지만 역사지리학 측면에서는 '반도사관'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회개혁적 측면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공동소유, 공동경작, 공동분배의 여전제(閭田制)를 주창한 정약용도 마찬가지로 '반도사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약용은 한사군 낙랑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으로 비정했는데, 주목할 것은 자신의 '강역고(疆域考)'의 '사군총고(四郡總考)'에서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서술하면서 "지금 사람들은 낙랑군 산하의 여러 현들이 혹 요동에 있었다고 많이 의심한다."라고 썼다는 점이다.

정약용 당시의 지식인들이 중국의 사료들을 직접 살펴본 결과 낙랑군 산하의 여러 현들이 요동에 있었다고 인식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런 견해들을 배척하고 한사군을 대부분 한반도 내로 국한시켰는데,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정약용의 이름을 '반도사관'에 악용했다. 만주족 청나라와 정묘·병자호란을 겪은 상황에서 정약용은 청과 충돌을 피하고 조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압록강 남쪽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한사군을 한반도 내로 비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은(殷)나라 왕족 기자(箕子)가 평양으로 왔다는 '기자동래설'을 조선의 정체성을 지키는 이데올로기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 생존 시의 여러 지식인들은 중국의 여러 사료들에 낙랑군이 '요동'에 있다고 나오자 그대로 수용했던 것이다. 지금의 한국 식민사학자들이 정약용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을 계승, 추종하고 있음은 이제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낙랑군=평양설'을 일본 제국주의 역사학이란 사교(邪敎)의 도그마로 떠받드는 한국 식민사학자들은 이에 대한 비판이 일자 "정약용도 식민사학자란 말이냐?"라면서 물타기에 열중하고 있다.

만약 정약용이 현재의 "무서운 아이들"을 비롯한 한국의 역사학자 대부분이 한사군의 강역을 한반도로 비정해서 중국에 넘겨주고, 한반도 남부에 임나가 있다고 비정해서 일본에 넘겨주고 있는 현실을 목도했다면 그의 애국심으로 어찌 이런 매국의 역사학을 지지하겠는가?

◆역사를 왜곡하는 집단들

역사는 저절로 왜곡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왜곡한 결과이다. 한국의 역사학은 고려 중기 이후 중화 사대주의 유학자들과 대일항전기 식민사학자들의 조직적 왜곡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고려 중·후기 유학자들이 '기자동래설'을 제기하고, 조선의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이를 더욱 구체화해 평양에 기자가 정사를 봤다는 기자궁(箕子宮)과 기자의 무덤을 가짜로 조성해 놓았다.

평양의 기자묘. 평양에서 기자의 흔적을 찾다가 찾지못하자 14세기에 조성한 가짜 무덤이다.
평양의 기자묘. 평양에서 기자의 흔적을 찾다가 찾지못하자 14세기에 조성한 가짜 무덤이다.

그러나 '사기'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주석에는 두예(杜預:222~285)가 말하기를 "양국(梁國) 몽현(蒙縣)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양국 몽현은 지금의 하남성(河南城) 상구시(商丘市)인데, 3세기 때 중국의 지식인 두예가 하남성 상구시에 있다고 말한 기자 무덤을 1천400여 년 후의 고려 및 조선의 유학자들이 평양으로 조작하고는 평양을 기자의 도시라는 뜻에서 '기성(箕城)'이라고 불렀다.

하남성 상구시의 기자묘. 3세기 때 인물인 두예가 기자의 무덤이 있다고 했던 곳에 아직도 무덤이 있다.
하남성 상구시의 기자묘. 3세기 때 인물인 두예가 기자의 무덤이 있다고 했던 곳에 아직도 무덤이 있다.

그러다 지금도 하남성 상구시에는 기자의 무덤이 있다. 정약용의 '강역고' '조선고(朝鮮考)'는 고조선에 대한 내용인데, "조선이라는 이름은 평양에서 일어났는데 이는 본래 기자의 도읍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약용은 "지금 사람들은 기자조선이 혹 요동에 있었는지 많이 의심한다"고 덧붙였다. 정약용 시대의 지식인들은 기자의 사료를 검토해보니 기자는 평양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중국이 경제적으로는 낙후되었지만 사회주의 혁명사상에는 진심이었던 1963년 중국 총리 주은래(周恩來·1898~1976)는 리지린을 대표로 하는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과 대담하면서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대국주의와 대국 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왜곡했다면서 "여러분의 머리에 조선족은 '기자의 후손'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주은래총리가 말한 중국과 조선관계(周恩來總理說中朝關係)')"라고 말해서 '기자동래설'을 부인했다.

◆찬란한 광명천하의 빛이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을 되찾았을 때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바로잡아야 했다. 그러나 미 군정이 친일파들을 그대로 기용하고, 이승만 정권 때도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바람에 이 역사적 과제가 무산되었다.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 출신 이병도는 서울대학교 사학과와 대한민국 학술원을 장악하고, 신석호는 고려대학교 사학과 및 국사편찬위원회를 장악해서 대한민국의 사학계를 거의 100% 장악하고는 총독부 역사관을 하나뿐인 정설로 승격시켰다. 우리 사회에서 유일하게 보수도 진보도 없이 식민사학 한 통속인 구조가 이렇게 탄생했다.

이병도(왼쪽)와 신석호, 해방된 나라에서 조선총독부 역사학을 하나뿐인 정설로 승격시킨 주역들로서 이들이 만든 구조에 대한 해체가 없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병도(왼쪽)와 신석호, 해방된 나라에서 조선총독부 역사학을 하나뿐인 정설로 승격시킨 주역들로서 이들이 만든 구조에 대한 해체가 없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전통적 식민사학자들과 새로 등장한 뉴라이트의 차이점이 하나 있다. 전통적 식민사학자들은 서론에서는 식민사학을 비판하고 본론과 결론에서는 식민사학을 반복하는, 겉과 속이 다른 집단인 반면 뉴라이트는 겉과 속이 같은 친일 매국집단이라는 점이다. 탄핵당한 윤석열 대통령의 선조들은 명재 윤증(尹拯)이 당수였던 소론(少論)이었다. 이완용이 마지막 당수였던 노론(老論)에 맞서 사회개혁을 주장하다가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에 대거 가담했던 당파였다. 우당 이회영 일가, 보재 이상설 등과 이건승, 홍승헌 등의 강화도 양명학자들은 모두 소론이자 독립운동에 나서 목숨을 바친 순국지사들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가문의 역사라도 제대로 알았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의 뉴라이트 세력들을 중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자신의 극단적 불행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릇된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가면 그 사회는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고, 현재 우리 사회는 이런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진영을 초월해서 터널의 끝은 찬란한 햇빛 비치는 광명천하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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