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87년 헌정 체제의 종언…대통령·선거·정당 등 정치개혁 급선무

노무현 정부 이후 대통령 5명 중 4명이 탄핵‧구속
대통령과 국회의 분점정부…여소야대의 갈등 첨예화
과반 미달한 제왕적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5년 단임의 한계
적대적 양당제를 낳은 소선거구 선거제도…"비례대표 확대해야"

1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1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인 현재 헌법은 많은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 여당과 야당은 극단적인 갈등을 빚고 있다. 대통령 탄핵이 잦아졌고, 여소야대가 반복되며 입법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일상이 됐다. 정치는 협력보다 극한 대립으로 나아갔다.

그야말로 한국 정치의 위기다. 정치 체제를 구성하는 세 요소인 권력구조(정부 형태)와 선거제도, 정당구도 등의 변화가 시급하다. 분권과 협치를 바탕으로 한 정치 체제로 변화해야 한다. 87년 체제를 넘어 새로운 공화국을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21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 동십자각 인근에서
21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 동십자각 인근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범시민 대행진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제6공화국 헌정사…대통령 잔혹사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가 열렸다.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에 대한 찬반을 물었다. 유권자 중 78.2%가 참여했고, 투표자의 93.1%가 찬성했다. 민주화 운동의 성과인 '87년 헌정 체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후 한국 헌정사는 탄핵으로 얼룩졌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 이후 대통령 5명 중 4명이 임기 중에 탄핵이 의결‧인용되거나 퇴임 후 구속됐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국회가 끌어내리는 일이 반복됐다.

특히 노무현 정부를 기점으로 대통령 잔혹사는 극심해졌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국회와의 충돌이 본격화했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나뉜 '분점 정부'가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헌법이 보장한 '이원적 정통성'의 허점이 불거진 것이다.

무엇보다 '여소야대'가 갈등을 부추겼다. 1988년 제13대부터 2024년 제22대까지 국회의원선거 10회 가운데 집권당이 과반에 미달한 경우가 6회에 달했다. 1988~2000년, 2016년, 2024년 등 빈번하게 여당이 야당에 주도권을 뺏겼다.

이는 대통령과 국회로 이원화된 권력구조에서, 대통령의 독주‧독단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야당에 힘을 실어주는 '분할 투표' 성향은 정국 불안으로 이어졌다. 이명박 정부를 제외하고 모든 정부가 1회 이상 여당이 다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전용주 동의대 행정학과 교수는 "대통령과 국회 모두 국민이 뽑았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면 해법을 찾기 쉽지 않다. 내각제는 정부와 의회 권력이 한 몸이고, 또 내각 불신임과 의회 해산 등의 방법이 있다. 하지만 대통령제의 경우 임기가 고정돼 있어서 탄핵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 이외에 갈등 해소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14일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원식 국회의장이 14일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연합뉴스
21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 동십자각 인근에서 열린
21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 동십자각 인근에서 열린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범시민 대행진(왼쪽). 오른쪽은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대한민국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 주최 '대통령 탄핵 반대 자유민주주의 수호 광화문 국민혁명대회'. 연합뉴스

◆'제왕적 5년 단임제'의 한계

대통령들은 시작부터 치명적 약점을 안았다. 과반도 안 되는 대선 득표율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51.55%) 이외에는 모두 절반에 못 미치게 득표했다. 절반의 반대를 안은 대통령들은 임기 초‧중반 크고 작은 이슈로 지지율 하락을 겪었고, 선거 불복에 가까운 저항에 부딪혔다. 1년차 60~80%의 지지율은 4~5년차에 10~20% 수준으로 떨어졌다.

5년 단임의 한계도 크다. 대통령의 권한 독점·남용을 제어하고자 단임제를 도입한 것이다. 장기 집권을 막는 데 초점이 맞춰진 짧은 임기로 인해 장기적 국정 과제 추진이 어렵고, 재선 가능성이 없는 탓에 책임 정치를 실현할 동기도 옅다.

여기에 잦은 선거도 부담이다. 5년 임기 중 약 2~3회에 걸쳐 총선과 지방‧보궐선거 등이 진행된다. 이들 선거는 견제와 심판 심리가 작용하는 중간 평가 성격이 강하다. 대통령과 여당보다 야당에 힘이 실리게 결과를 낳아, 국정 동력은 더욱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도 대권에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왕적이라 불릴 정도의 집중된 권한 때문이다.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인사권, 재정권, 행정권, 입법권(법률안 제출권과 거부권, 헌법개정제안권, 국민투표부의권 등), 외교권, 국방권, 국가긴급권(계엄선포권, 전쟁선포권, 긴급명령권) 등의 권한을 가진다.

이중 인사권의 예로 박근혜 정부를 보면, 장·차관급 등 100여 명을 비롯해 대법원장과 대법관, 헌법재판소장·재판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등 헌법 기관 고위직도 20여 명에 달한다. 여기에 정부 부처 고위 공무원, 검찰과 경찰, 외부 공무원, 국립대 총장 등 대통령이 임명하는 인원은 7천 명에 이를 정도다.

대통령을 '선출된 왕'으로 여기는 정치 문화도 더해졌다. 모든 문제를 마치 왕처럼 대통령을 중심으로 해결하려는 의식이 여전히 만연하다. 정권 탈환에 혈안이 돼 '반대를 위한 반대'인 비토크라시(Vetocracy, 거부정치)가 정치권에 팽배한 배경이다.

15일 오후 국민의힘 대구시당 대강당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경북 지역 당선인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국민의힘은 4·10 총선에서 참패했지만 TK 당선인 25명에 대한 지역민의 기대는 크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15일 오후 국민의힘 대구시당 대강당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경북 지역 당선인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국민의힘은 4·10 총선에서 참패했지만 TK 당선인 25명에 대한 지역민의 기대는 크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극한으로 치닫는 대립과 갈등…양당제‧소선거구 폐해

대통령제 등 권력구조의 성격을 결정짓는 데 국회는 뗄 수 없는 요소다. 삼권 분립 아래 대통령과 함께 국회는 민주적 정당성을 보유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국회 내 정당구도와 이를 결정짓는 선거제도가 중요하다.

무엇보다 양당제가 핵심 문제다. 두 거대 정당으로 양극화된 정치 환경에서 대립은 극대화된다. 협력과 타협은 실종되고, 대통령과 여당을 정략적으로 공격하는 행태가 반복된다.

우리 제도는 다당제를 표방하지만, 실제는 양당제에 가깝다. 1988~2024년(제13~22대) 국회의원선거 결과를 보면, 전체 의석에서 제1, 2당 비중이 90%가 넘는 경우가 10회 가운데 5회나 된다. 2000년(90.8%)과 2004년(91.3%), 2012년(93.0%), 2020년(94.3%), 2024년(94.3%) 등이다. 2000년 이후 양당 체제가 본격화됐다. 특히 최근 두 번의 총선에선 90%대 중반에 이를 정도로 두 당이 의석을 독식했다.

양당제의 여소야대 상황과 강한 규율의 정당 문화가 결합하면서, 대통령은 야당을 대화로 설득할 여지가 줄었다. 제3당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합당과 해체 등으로 다시 양당제로 되돌아갔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이끌던 1992년 통일국민당(31석, 10.36%)은 반값 아파트 공약 등으로 새 바람을 일으켰지만, 같은 해 치러진 대선 이후 각종 수사가 진행되면서 결국 소멸됐다.

양당제는 선거제도에서 비롯됐다. 바로 지역구 중심의 소선거구 1인 다수대표제의 폐해다. 다수결로 한 명의 당선자를 뽑는 '승자독식' 지역구 선거는 많은 문제를 낳았다. 특히 '표의 불비례성'이 심각하다. 득표보다 의석을 더 많이 차지하거나, 지지율에 모자라게 의석을 배분받는 것이다.

2024년 총선의 지역구 결과를 보면, 더불어민주당의 득표율은 50.6%인데 의석 점유율 63.4%로 더 많았다. 반면 국민의힘은 45.1%를 득표해 의석은 35.4%를 가졌다. 이를 1석당 투표수로 환산하면 더불어민주당은 9만1천표이고, 국민의힘은 14만6천표로 격차가 크다. 소수정당인 진보당(30만2천표)과 새로운미래(20만표), 개혁신당(19만5천표)의 경우 표의 불비례성이 더욱 심했다.

강우진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024년 총선 전체 300석 중 비례대표는 46석(15%)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지역구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가운데도 비례대표 의석이 상당히 적은 편이다. 결국 비례대표를 통해 사회적 약자와 청년들의 이해관계가 제대로 대표되기 힘든 구조"라고 지적했다.

소선거구에선 낙선자에 대한 투표는 사표(死票)가 된다. 이로 인해 정치 효능감이 떨어진다. 자신을 대변할 제도권 정당이 없는 유권자들은 거리 집회 등 직접 행동 방식으로 정치적 요구를 표출한다. 유튜브와 SNS 등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정파적으로 극단적인 주장을 담은 콘텐츠를 통해 확증 편향을 강화하는 등 왜곡된 정치 문화가 생겨났다.

헌법·정치학자 등 전문가들은 이 같은 한국 정치의 폐해를 막기 위해선 민주주의 모델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승자독식의 '다수결 민주주의'에서 분권과 협치의 '합의제 민주주의'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적대적인 양당제를 극복하려면 소선거구 지역구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거제도를 바꿔 비례대표를 확대하는 등 다당제가 안정적으로 정착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역임한 헌법학자인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은 "이긴 사람이 권한을 독차지하는 승자독식 구조의 문제가 한국 사회에 누적돼왔다. 이제는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대통령제를 바꿔야 한다"며 "거대 양당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려면 소선거구제를 개편해 다당제 연합정치를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획탐사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일인 10일 오후 울산시 남구 문수체육관에 마련된 개표소에서 개표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연합뉴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일인 10일 오후 울산시 남구 문수체육관에 마련된 개표소에서 개표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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