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거대한 뿌리, 구미]<13> 낙동강 습지 그리고 매학정

굽이 흐르는 물길 품은 정자, 고고한 한 마리 학과 닮았네

강정습지 일출.낙동강은 우리에게
강정습지 일출.낙동강은 우리에게 '어머니 강(江)'이라고 할 수 있다.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만들어 준 그런 푸근하고 정겨운 존재인 셈이다.

태초에 강(江)이 있어 문명이 태동하고 발달했다.메소포타미아,인더스, 황허의 세계 3대 문명은 모두 큰 강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한반도의 문명도 큰 강을 중심으로 생겨나서 국가로 발전하고 오늘의 K-문화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한강과 낙동강, 금강, 대동강 등 하나의 유역을 형성한 큰 강과 하천, 실개천으로 이어진 거대한 문화권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고대국가가 탄생했고 삼국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강은 문명을 태동시키고 국가를 발전시킨 원천이었다.

대한민국의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를 아우르는 '한강의 기적'은 한강 유역 주도로 만들어 낸 기적이라기보다는 낙동강과 금강 등을 포괄하는 이 나라 산업화 세력과 온 국민의 희생과 노력의 결정체라고 봐야 한다.

◆매학정(梅鶴亭)

호리병 기울여 모래사장을 쏟아 놓고

모래 톱 에워싸고 맑은 여울이 소리 내어 흐르네

외로운 학 한 마리 소나무 끝에 앉아 울고

꿈속 강을 돌아 달 위로 올라 간다

壺傾籍沙眠 繞沙淸灘響 孤鶴叫松梢 夢回江月上

돌 위에 걸터앉아 거문고를 타고

소나무 바람과 잇닿아 멀리 울리노라

갑자기 학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맑은 강 동쪽에 달이 솟아오른다

彈琴石榻上 逸響連松風 遽看鶴舞影 月出淸江東

낙동강변에 위치한 매학정은 명필가로 알려진 황기로 선생이 중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관계에 나가지 않고 시(詩)와 서(書)로 소일하며 풍류생활을 즐기던 곳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낙동강변에 위치한 매학정은 명필가로 알려진 황기로 선생이 중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관계에 나가지 않고 시(詩)와 서(書)로 소일하며 풍류생활을 즐기던 곳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매학정 툇마루에 앉아 눈앞에 흐르는 강(洛東江)을 바라보면서 읊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67) 선생의 사위 이우(李瑀)가 지은 한시 매학정이다. 이우는 율곡 이이(李珥)의 동생이다. 매학정 앞 홍매,백매 등 다섯 그루의 매화나무는 한겨울이라 앙상한 가지를 노출한 채 낙동강을 따라 불어오는 북풍에 잔뜩 움츠린 듯한 모습이지만, 새해가 되면 잎보다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봄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알려주는 봄의 전령사역할을 변함없이 수행할 것이다.

천혜의 '강정습지'가 끝나는 곳에 자리 잡은 매학정이 거기에 있었다. 구미보에서 자전거길을 따라 10여분 달리면 '숭선대교'에 닿는다. 그 다리 너머를 건너면 고아읍이다. 강정습지는 낙동강 중류 최고의 철새도래지로 소문난 자연습지로 수많은 습지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자연생태계의 보고다. 이곳에 조선 최고의 명필가로 이름을 날린 황기로의 '매학정'이 있어 비로소 낙동강도 사림(士林)의 풍모를 제대로 갖출 수 있었다.

흔하디흔한 것이 낙동강에 자리 잡은 누각과 정자지만 매학정은 안동 영호루, 의성 관수루, 밀양 영남루를 3대 누각이라고 치지만 매학정은 그런 누각이 아니라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의 무대 만휴정과 고산정 혹은 체화정과 달리 낙동강 본류를 고즈넉하게 조망하는 선비의 모습을 닮았다.

벼슬을 하지 않은 황기로는 초서에 능해 '해동초성'(海東草聖)으로 불릴 정도의 명필가로 잘 알려져있다. 금오산 자락에도 '金烏洞壑'이란 글자가 각인돼 있는데 황기로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다. 강정습지가 있는 강정(江亭)마을은 낙동강변의 매학정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낙동강위에 떠 있는 한 마리 학(鶴)같은 정자가 바로 매학정인 셈이다.

천연기념물 제203호 재두루미가 2019년 구미 낙동강 해평습지를 찾아 습지 상공을 힘차게 비상하고 있는 모습.매일신문 DB
천연기념물 제203호 재두루미가 2019년 구미 낙동강 해평습지를 찾아 습지 상공을 힘차게 비상하고 있는 모습.매일신문 DB

이 강정습지는 인근의 '해평 습지', '독동·생곡 습지'와 더불어 낙동강 최대 겨울 철새도래지로 꼽히기도 한다. 매학정의 학은 물론 두루미와 백로, 왜가리와 청둥오리 등이 본격적으로 찾아드는 철새도래지다. 해평습지에는 철새들을 탐조할 수 있는 탐조시설들이 설치돼 있다.

고산 황기로가 벼슬을 마다한 채 이곳에 매학정을 짓고 은거하다시피 한 것은 조선 초 개혁을 외치던 '조광조'가 기묘사화(士禍)로 희생당한 사건과 관계가 없지 않다. 조광조와 견원지간이던 심정·남곤의 상소로 사사(賜死)됐지만 그 과정에 황기로의 부친 황이옥의 부역행적을 만나게 된다. 황이옥이 조광조를 사사하라는 상소를 올렸다는 것을 안 황기로의 조부 황필은 아들의 상소를 부끄러워하면서 선산으로 낙향했다.

그 후 황필의 손자 황기로도 부친의 상소를 부끄럽게 여겨 조부가 터를 잡은 이곳에 '매학정'을 지어 초야에 묻혔다는 것이다. 길재-김종직-김광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성리학의 본산 선산에서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선비의 자세였을 것이다. 황기로는 벼슬을 멀리하고 텃밭을 일구면서 욕심내지 않는 소박한 선비의 삶을 이었다.

구미보 전망타워는 장수와 복의 상징인
구미보 전망타워는 장수와 복의 상징인 '거북'과 '용'을 소재로 형상화한 건축으로 독특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낙동강은 어머니 강(江)

구미보로 향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4대강사업'의 성과중 하나인 '구미보'는 구미지역 낙동강에 설치된 유일한 보다. 구미보에는 장수와 복의 상징인 '거북'과 '용'을 소재로 전망타워와 통합관리시설 등을 형상화한 건축으로 독특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구미보 정중앙에 위치한 중앙타워는 평소 개방돼 있어 올라가면 360도로 탁 트인 낙동강을 즐길 수 있다.

구미(龜尾 거북꼬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구미는 거북이라는 십장생 중 첫 번째 상징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정부의 국새도 박정희 집권이후 36년간 거북이모형국새를 사용한 바 있었을 정도로 거북은 국가적으로 귀하게 여기는 성스러운 상징이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강을 꼽으라면 한강이지만 낙동강은 우리에게 '어머니 강(江)'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이 양쯔강과 더불어 '황허'(黃​河)를 어머니강(母親江)이라고 부르면서 사랑하듯이 우리에게 낙동강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만들어 준 그런 푸근하고 정겨운 존재인 셈이다.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등 영남지방을 굽이굽이 관통해서 흐르다가 부산을 거쳐 남해바다로 흐르는 영남의 생명줄이다. 한반도에서 압록강 다음으로 긴 강으로 신라천년의 역사를 품고 6.25 전쟁 등 민족의 비극을 겪기도 했고 구미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할 수 있었던 원천으로 대한민국 산업화의 최고의 동력으로 평가받는다.

낙동강이 거기 있어 구미에 공단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시사철 수량이 풍부한 낙동강이 지척에 있어 내륙 깊숙한 구미에 부강한 대한민국 기틀이 된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할 수 있었다.

낙동강 캠핑장
낙동강 캠핑장

◆낙동강체육공원

구미시내로 접어들어 넓게 펼쳐진 낙동강변은 구미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휴식공원이자 보석과도 같은 낙동강 체육공원이다. 봄이면 강정습지에서부터 노랗게 물든 금계국 물결은 장관이다.

체육공원은 여름에는 야외물놀이장이 개장되고 겨울에는 눈썰매슬라이드와 스케이트장을 갖춘 '스노우파크'로 변신한다. 특히 지난 주말(21일) 개장한 낙동강 스노우파크는 내년 1월 19일까지 운영된다. 스노우파크 바로 옆 낙동강 캠핑장은 오토 및 일반캠핑장을 대여하지만 구미도시공사가 운영하는 숙박시설 '카라반' 10여대도 함께 설치돼 있어 사전 예약을 하면 1회 최장 3박4일까지 이용할 수 있다.낙동강의 중심, 구미는 대한민국의 본류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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